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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보라 Sep 08. 2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믿어보기로 한다

‘우리가 운명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아요’

이제 사랑이고 뭐고, 연애고 자시고, 남자는 그놈이 그놈이라는 생각으로 감히 비혼을 꿈꾸던 때가 있었다. 여기저기 생활기스가 난 마음 따위는 누가 받아도 그다지 기뻐하지 않을 것 같아 엿이나 바꿔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것이 진심이었고, 그 진심을 먹고 사는 연애 지상주의자는 경력이 길어질수록 가치가 떨어지고, 돈도 되지 않아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가장 쓸모없는 지위라고 자조했다. 가장 아꼈던 것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 되는 건 마치 당연한 수순인듯, 연애라는 말에 치를 떨며 완강히 거부하던 내 인생에 몇 날 며칠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나의 결단과는 무관하게, 나의 상황과는 별개로 찾아오는 연애는 이번에도 어김이 없었다. 다시는 연애를 하지 않겠다까지는 아니어도, 향후 1년간은 절대로 연애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 마음속에 각서를 써두고 사인을 하기 직전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소개팅할래?"


 '소개팅? 말도마. 우연히 지나가다 나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그 사람이 내 이상형이면 모를까, 굳이 나서서 소개팅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고! 적어도 향후 1년간은 말이야.' 

라고 속으로 외치고 친구에게 말했다. 


"어떤 사람인데?" 


하겠다는 의미는 정말 아니었다. 작가적인 시선에서 세상에 어떤 사람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에 기인한 질문이었다. 친구가 사람 보는 안목이 어떤가 궁금했을 뿐, 정말 당장에 누군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친구는 그 사람의 직업, 성격, 외모 따위의 것들을 나열했다. 친구가 읊어주는 그의 프로필은 내가 흥미를 느낄 만 한 몇 가지 사실과 더불어 만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단서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엔 하지 않겠다고 고개를 저었으나 친구는 그럴듯한 말로 나를 설득했다. 우린 아직 어리고, 많이 만나봐서 나쁠 것 없고, 또 상대방이 나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라고 슬쩍 귀띔도 해주었다. 나는 좀 더 생각해보겠다고 결정을 미루었지만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친구의 설득에 못 이기는 척 소개팅을 하기로 했다. 대신 2주 있다가 만나는 것으로 타협에 성공. 


대답을 던져놓고 나서야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대체 왜 소개받기로 한 거야? 연애는 지긋지긋하다고, 너 자신에게 집중해야겠다고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정말 남자 없이는 못 사는 거야?' 그리고 10초 후 속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그놈이 그놈이라지만 혹시라도 그 사람이 정말 너의 운명의 남자면 어떻게 해?' 나는 나를 너무나 잘 알아서 설득하기가 이렇게나 쉽다. 


 그리고 2주를 못 채우고 1주일 만에 만난 그 사람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지만 우리의 대화는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었고, 어쩌면 지금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걸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걸 줄 수 있는 사람’ 이 한 문장은 내가 정의하는 내 연애의 발화점과 같은 말이다. 별수 있나. 그날부로 완전히 그에게 설득된 나는 또 그렇게 연애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꼭 나 같은 사람 만나서 연애하고 싶었던 내 꿈이 곱절로 이루어진 것처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사랑으로 물밀 듯이 들어왔다. 오랜 가뭄에도 언젠가 내릴 큰비를 기다리며 다져놓은 마음 둑에 그렇게 긴 장마가 찾아왔다.  


하필이면 다른 때도 아닌 지금 만난 사람이 당신이어서, 나는 속절없이 또 한 번 사랑을 믿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연애는 시작도 끝도 오롯이 당신 책임이다.  


 모든 연애가 그렇듯 그와도 별다를 거 없는 연애 중이다. 피곤하다고 말도 없이 잠든 그에게 뾰루통해져 일부러 먼저 연락하지 않는 아침도 있고, 점심으로 부대찌개를 먹었는데 저녁에 얼큰한 게 당긴다는 그에게 부대찌개가 먹고 싶다고 거짓말을 하는 저녁도 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사무치게 그리운 점심시간과 몇 시간째 연락이 되지 않아서 불안한 오후가 있고, 서로 다른 가치관 때문에 말씨름을 하다 마음이 상하는 밤과 문득 잠에서 깨어 확인한 휴대폰에 남겨진 구구절절한 메시지에 싱긋 웃음이 나는 새벽이 있는 그저 그런 연애 중이다.  


그래. 어차피 연애라는 게 다 그런 거고, 사랑이고 뭐고 연애고 자시고, 남자는 다 그놈이 그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 썸이라는 태그를 제거하면 반품도 안 되는 연애를 나랑 해보겠다는 그가 사랑스럽게만 보이던 그 밤이 중요한 거니까.



운명의 불확실성은 우리를 매 순간 의심하고 추측하게 만들지만 그 과정에서 더욱 짙은 진심을 우러나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막연함 속에 움트는 용기와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속에 자리잡은 열심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우리가 운명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아요’라는 고백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사람과 내가 운명일까 아닐까를 고민하지 말 것. 사랑을 향한 당신의 노력은 신의 계획까지도 전면수정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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