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나만 아는 세계
어제도 꿈을 꿨다. 최근에 피부과에서 잡티를 없애보겠다고 레이저 치료를 꽤 여러 번 받았었는데 없어졌던 잡티가 죄다 올라와 얼굴을 뒤덮는 아주 심각한 악몽이었다. 아침에 꿈에서 깨자마자 거울을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또 며칠 전에는 내가 꽤 오래 혼자 좋아했던 남자가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꿈도 꾸었다. 현실에서는 나에게 시종일관 무관심했던 그가 꿈속에서는 얼마나 집요하게 따라다니는지 꿈에서 꿈인 것을 알아차릴 정도였다. 꿈에서 깨어난 후 기대감을 가지긴커녕 꿈에 어떤 의미부여도 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내 마음이 그 사람에게서 완전히 떠났구나 하고 인정했다.
매일 밤 적으면 하나, 많으면 서너 개 정도의 꿈을 꾼다. 거의 매일 밤이 그렇다. 하도 꿈을 꾸다보니 사람들이 길몽이라고 말하는 돼지꿈, 똥 꿈, 불 꿈은 며칠에 한 번 꼴로 꾼다. 그래서 내가 그런 꿈을 꾸었다고 말하면 ‘넌 꿈을 하도 자주 꿔서 꿈빨이 약해.’하고 웃어넘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로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이나 꿨다 싶은 대박 꿈을 꾸고 나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로또를 사본 적이 없다.(일획천금 자체를 경계하는 성향이기도 하고) 게다가 꿈에서 깨고 나서 기억나는 것도 남들보다 훨씬 많아서 등장인물부터 배경, 줄거리, 주인공의 감정까지 대부분의 것들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편이다. 이게 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 돼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꿈 맞아? 지금 말하면서 디테일을 덧붙이고 있는 거 아냐?’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살 정도다. 어릴 때는 이렇게 꿈을 꾸는 것이 좋았다. 남들은 잠을 자는 시간에 나 혼자 공으로 하루를 더 버는 것 같았고, 가끔 꿈을 통해 얻어지는 찰나의 깨달음이나 간접경험 같은 것들이 나의 현실에 어떤 도움을 주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꿈의 해상도가 높다 보니 꿈과 현실을 헷갈리는 경우도 적지 않고, 내가 사는 현실과 꿈이 반대로 이루어진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은 적도 있다. 꿈과 현실이 비등비등한 삶을 살다 보니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악몽이겠거니 하면 마음이 편해졌고, 좋은 일이 생기면 꿈이면 어떻게 하지?하는 불안도 생겼다.
세상을 살다 보니 몰라도 될 것들을 조금씩 알게 되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꿈이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고립된 무의식이라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꿈은 꿈이 아니라 진짜 내가 사는 현실이라는 진실이었다. 그 사실을 안 뒤로 나는 어떤 꿈을 꾸든 마음이 뒤숭숭해지고 잘 헤어나오지 못하곤 했다. 대부분 나의 무의식은 현실보다 끔찍한 경우가 많았으므로.
꿈이 나의 무의식임을 알고 나서 유일하게 편한 점은 나조차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을 때다. 어느 날부턴가 꿈에 반복적으로 그 사람이 나오면 나는 여지없이 내 마음을 인정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가늠하는 데에 그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오늘 네가 꿈에 나왔어.’는 ‘나 너를 좋아하는 게 확실해졌어.’ 와 동일한 의미가 된다. 가끔 흘리는 나의 고백인데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개꿈이네’하고 넘겨버리기 일쑤다.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나만 아는 세계. 내가 가장 옳고, 내 감정만이 가장 중요한 그곳. 해상도 높은 Full HD 꿈속에서 나는 선명하게 내가 가장 외면하고 싶었던 나의 진심을 대면한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건 사랑이 아니라 질투였구나.
앞에선 센 척 하더니 버림받을까 봐 두려운 거였네.
뭐야, 아닌 척해놓고 온통 신경 쓰고 있었잖아.
어휴…. 혼자 이렇게 음탕한 생각을 했단 말이야?
따지고 보면 연애에 있어 무의식의 역할은 절반, 혹은 그 이상을 훌쩍 넘을지도 모른다. 꼭 연애라 국한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은 우리가 의식하는 것 너머에 있지만 우리의 의식을 전부 지배하곤 하니까. 그래, 어쩌면 세상은 누군가의 무의식과 또 다른 누군가의 무의식의 합집합이고, 연애는 누군가의 무의식과 또 다른 누군가의 무의식의 교집합이라고 설명해도 좋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무의식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건 참 다행이자 불행이다. 나의 무의식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니 속 편하긴 하지만, 상대방의 무의식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그저 혼자 속을 삭여야 한다. 그래서 좋아하는 마음, 그리고 멀어지는 마음처럼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연애를 결정짓지만 결코 그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건 조금 씁쓸한 일이다. 마음이 멀어지는 것이 상대방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건 결코 윤리적으로, 또 도덕적으로도 잘못된 일이 아니라 그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그를 너무 미워하지도 말고, 스스로를 너무 자책하지도 말자.
연애에 일어나는 모든 비극은 그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들이 벌여놓은 짓거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