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호 Oct 12. 2019

그대 떠나간 자리에 앉아서

문태준 시인의  '나는 이제 이별을 알아서' 감상

누군가와 진정으로 이별하였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는 순간은 언제일까.

참깨꽃 져내린 자리에서 그대를 부르다.



나는 이제 이별을 알아서     


                                                   문태준     

그때는 가지꽃 꽃그늘이 하나 엷게 생겨난 줄로만 알았지요

그 때 나는 보라색 가지꽃을 보고 있었지요

당신은 내게 무슨 말을 했으나

새의 울음이 나뭇가지 위에서 사금파리 조각처럼 반짝이는 것만을 보았지요

당신은 내 등 뒤를 지나서 갔으나

당신의 발자국이 바닥을 지그시 누르는 것만을 느꼈었지요

그때 나는 참깨꽃 져내린 하얀 자리를 굽어보고 있었지요

이제 겨우 이별을 알아서

그때 내 앉았던 그곳이 당신과의 갈림길이었음을 알게 되었지요     


                                                                                              『먼 곳』, 문학과 지성사       

                         

                                                                                                                                                                         


누군가와 진정으로 이별하였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는 순간은 언제일까. 사람은 너무 큰일을 당하면 그 순간에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이별하였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겠지만 체감 상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 테다. 부모님을 여읜 이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장례를 치르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기까지는 경황이 없이 지내다가 일상에서 문득 부모님의 부재를 깨닫고 통곡을 하게 된다고 한다. 운전을 하다가, 집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혹은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도 불쑥 깨닫게 되는 이별. 시적 화자의 상황도 이와 유사해 보인다. ‘나는 이제 이별을 알아서’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화자는 상대와의 이별을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깊이 깨닫고 있다. 시의 첫머리의 ‘그때는’과 ‘이제’ 사이에는 길든 짧든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이별을 이야기하는 방법에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시의 화자는 슬프다는 표현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도 슬픈 정서를 시 전반에 걸쳐 전하고 있다. 그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듯이 편안한 어조로 장면을 포착하여 서술한다. ‘보라색 가지 꽃’, ‘나뭇가지 위에서 울던 새’, ‘참깨꽃 져내린 자리’의 정경들은 슬픔을 자아낸다. 몇 년 된 이야기지만 필자 또한 큰 이별을 겪은 적이 있다. 시적 화자가 그랬듯이 그분과의 이별을 생각하면 이별 당시의 주변 정경들이 박제된 듯이 떠오르곤 했다. 그분이 입고 있던 옷의 색깔, 그때 펼쳐져 있던 책, 당시 들리던 노래 멜로디로 이별을 기억했다. 나도 놀랄 만큼 아주 세부적인 것까지 기억이 나서 그만큼 오래 힘들었다. 이별은 ‘이별하였다’는 말보다는 풍경으로 기억된다.


 시의 첫 부분에서 서술하고 있는 ‘가지꽃 그늘’ ‘보라색 가지꽃’이 피워내는 정경을 살펴보자. 그림자에도 빛깔이 있다면 가지 꽃그늘은 보랏빛일 것이다. 보라색은 슬픔과 어울리는 색이다. ‘보라색 가지 꽃’이라는 표현으로 시는 더욱 슬퍼지고 감각적이게 된다. 물론 가지 꽃이 실제로 보라색인 것은 맞지만 보라색이라고 특정하여 서술함으로 정서가 심화된다. 3행을 보면 상대는 화자를 앞에 두고 이별을 선언했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화자는 그 순간 멍해진 탓에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듯하다. 어쩌면 이별의 순간 앞에서 ‘말의 형태’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저 나뭇가지 위에서 ‘사금파리 조각처럼 반짝이는’ 새의 울음을 본다. 새의 울음이 반짝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나, 정황상 이별의 순간 새가 울고 있었고 그러한 새를 바라보던 화자의 눈에 맺힌 눈물이 사금파리 조각처럼 반짝 빛을 냈던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상대가 이별을 선언하고 시적 화자의 뒤를 돌아 떠나기까지는 시간상으로 그다지 길지 않다. 이별의 말을 고하고 훅 돌아서 가버린 시간은 순간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시를 읽어보면 화자의 시간은 길게 흘러간 듯하다. 상대가 등 뒤를 지나가는 동안 시적 화자는 상대방의 발자국이 바닥을 누르는 것을 느꼈고 참깨 꽃이 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상대적이기도 해서 시간 속에 있는 이가 어떤 상태이냐에 따라 같은 시간이 길게도 짧게도 느껴지는 법이다. 평소라면 지나치기 쉬웠을 발자국에 주목하고, 발자국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을 화자의 애통한 정서가 가벼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는 담담한 어조로 이어지고 있고 감정을 드러내는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고 있으나 감상자로 하여금 짙은 슬픔을 느끼게 한다. 이별의 순간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주변의 자연물을 소재로 삼은 덕에 시가 더욱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읽기에 어렵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오래 여운을 준다. 문태준의 여러 시를 두고 마지막에 이 시를 선택한 이유도 그 여운 때문이었다. 이별을 한 사람은 상처가 아물 때까지 계속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간다.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니 나희덕 시인의 ‘기억의 자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시적 화자가 당신이 떠난 그 자리에 너무 오래는 머무르지 않기를 소망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인의 따뜻한 마음을 생각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