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스름해진 햇살이 가을을 가장 먼저 알리고 그다음은 서늘한 공기, 단풍 순으로 도착한다. 길을 가다 나뭇잎에 깃든 가을을 발견하다.
小滿
나희덕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小滿지나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小滿 지나면 들리는 소리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
창작과 비평사, 『어두워진다는 것』
이 시를 읽던 무렵이 바로 시에서 묘사하고 있는 소만 무렵이었다. 소만 즈음의 정경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아름다운 시로 풀어낼 수 있다는 점에 감탄하면서 읽었다. 시를 읽고 난 후 시가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아 학교를 오가는 내내 나무를 보고 시를 떠올리며 다녔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초록이 없이 갈색의 가지만이 세상을 채운 겨울을 힘들어한다. 봄이 오면 꽃을 기대하기도 하지만 나무들이 뿜어내는 초록에서 활기를 얻는다. 여름이 오기 전까지 나뭇잎들은 다채로운 변화를 보여주는데 시인도 그에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았던 듯하다.
시의 제목인 소만은 24절기 중 하나이고 뜻을 풀어보면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의미이다. 1연은 그런 소만의 정경을 서술하고 있다. 나뭇잎을 관찰해보면 초봄 무렵까지는 더디게 나오다가 소만 무렵을 지나면서는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진다. 그러나 아직 여름만큼은 아니어서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하늘이 비치기도 한다. 1연에서 2연까지 이어지는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만하다 싶은’과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라는 구절은 그런 정경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있다.
여러 해를 살아온 나무를 볼 때 올해 새로 난 잎을 구분하는 방법은 색깔을 통할 수도 있지만 때깔을 통할 수도 있다. 새로 난 잎은 반짝반짝 윤이 난다. 시에서는 그러한 초록의 모습을 물에 비유하고 있다. 3연의 ‘찰랑찰랑’이라는 의성어와 ‘차오른다’, ‘초록의 물비늘’이라는 표현은 물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물은 햇빛을 받으면 반짝거린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 때마다 반짝임을 더하곤 하는데 소만 무렵 갓 나온 잎들이 햇빛을 받아 빛나는 풍경은 이러한 물의 모습과 닮았다.
4월의 나뭇잎은 연한 녹색이지만 5월부터는 초록빛이 돌기 시작하며 중순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새까맣다 싶을 만큼 짙어진다. 그때쯤 해서는 나뭇잎도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다. 시적 화자는 그러한 정경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라고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4연에서 무성 해지는 초록의 정경을 묘사한다. 4연에서 묘사하는 소만이 지난 이후 초록의 특성은 ‘어둠’이라고 할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무성 해지는 나무들은 초록을 넘어 진초록, 어둠에 가까워진다.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한다는 표현은 나무들이 그만큼 다른 말을 할 틈도 없이 무성 해지는 일에 집중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다. 나무의 말이 곧 그늘이 되며 그 그늘 아래서 맥문동이 꽃을 피운다. 맥문동은 아파트 화단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풀이다. 나희덕의 시를 보면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가져와 시의 소재로 삼곤 하는데 이 경우도 그렇다. 맥문동 꽃은 시의 정경을 더욱 구체적으로 떠올리게 해 준다.
3연에서 찰랑찰랑 차오르던 초록이 5연에 와서는 물비린내를 풍기고 있다. 초록은 물비린내를 풍기면서 ‘누가 부끄러운 내 발등을 덮어 달라’며 중얼거린다. 부끄러운 발등이란 어떤 의미일까. 왜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시적 정황을 살펴 추측해보자면 넘칠 것 같이 무성한 초록에 비해 나무의 빈 발등이 가진 것이 없이 허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를 감상할 때 이전에 알던 도식을 적용하거나 시에서 드러나지 않은 정황을 가져오는 일은 때로 정확한 감상을 방해한다. 3연에서 ‘내 마음의 그늘’이라는 표현과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에 주목하여 시적 화자가 ‘나무를 보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 고 해석하면 지나칠까. 어떤 존재이든 최절정을 맞이한 이후에는 저물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초록은 마지막으로 빛을 내고 나서는 어두워져만 가고 이내 저물 것이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그러하다. 같은 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들을 읽어보거나 당시 시인의 나이를 추측하면 이러한 해석이 꼭 틀린 소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이 맞다면 부끄러운 발등을 덮어달란 소리도 그냥 읽히지는 않는다. 나무의 허전한 밑동을 보고 화자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읽든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던 시이다. 시가 초록을 부르고 초록이 시를 부른다. 소만 즈음에 아주 좋은 시를 알게 되어 기쁘다.
위 글에서 밝힌 바대로 소만 즈음에 시를 읽고 감상을 적었다. 서랍에 넣어두었다가 내년 소만 무렵 꺼내놓으려던 것을 가을이 익어가는 지금 내놓기로 한다. '여름이 낫냐, 겨울이 낫냐.'는 물음에 "여름이요"라고 대답하면, 질문자는 "여름에 물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이라고 하지만 겨울이 더 좋았던 적은 없었다. 무성해져 갔던 초록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