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첫 부분을 읽으면서부터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구보가 집안에서 밖으로 나서기까지의 과정이 세밀하게 서술되어 있어 읽는 재미가 있었고, 쉼표를 자주 사용한 독특한 서술이 주는 효과도 있었다. 어머니의 말씀에 대답을 하지 않고 중문을 나서는 구보를 보면서는 ‘자식 놈들은 1930년대에 사는 놈이나 2000년대에 사는 놈이나 다 비슷하구나.’싶어 쓴웃음을 지었다.
대뜸 자식 이야기를 꺼낸 건 웃자는 뜻이 아니라 소설을 읽으면서 그만큼 구보에게 친밀감과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구보의 여정을 따라가고 그의 생각을 읽으면서 그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했고, 구보가 너무 오래 고독에 빠져있을 거 같으면 속으로 ‘구보야 어서 나와’, ‘생각 좀 그만 해. 구보야.’, ‘구보야, 울면 안 돼.’와 같은 소리들을 했다.
소설을 읽으며 유난히 등장인물에게 친밀감을 느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작품의 독특한 서술방식 때문일 것이다. 소설뿐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 등 서사 장르에서는 사건을 끌어가는 중요한 사건만 보여주지만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인물이 보고 듣고 생각한 바를 모두 다루고 있어 인물에게 보다 더 친밀감을 느꼈다. 소설의 서술방식은 요즘 문화에 비치면 브이로그 같다고도 하겠지만 인물의 깊은 생각이 담겨 있어 그것과는 또 달랐다.
‘구보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성격일까?’ “26세/미혼/고학력자_동경유학생/소설가/경제력_ 중하 수준”과 같은 프로필이 그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구보는 행동하기보다는 망설이는 사람이고, 수줍음도 많고, 소극적이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그칠 줄 모르고, 불안이나 고독 등 내적인 갈등이 많고, 갈등이 많은 만큼 또 행복이라는 이상을 강하게 추구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상처도 받고 막연히 현실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구보가 나랑 참 비슷하다는 생각도 같이 했다.
구보가 위와 같은 성격을 갖게 된 데는 타고난 기질 탓도 있겠지만 환경적인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배운 대로 추측을 해보자면 그는 1930년대 조선의 현실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부유(浮游)하는 지식인이고, 문약(文弱)한 지식인이다. 소설에 제시된 ‘어디에나 다 그의 갈 곳’이라는 말은 그는 실상 갈 데가 없다는 뜻이다. 왼쪽 귀에 중이염에 걸렸으면 좋겠다고 하거나 오른쪽 귀의 청력이나 시력에도 자신이 없다고 하며 육체에 정력이 넘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구보의 태도에서 자신을 약한 자, 병든 자로 바라보는 그의 의식이 느껴졌다.
구보는 분명 1930년대 조선을 사는 지식인이다. 하지만 동시대를 다룬 다른 작품과 달리 시대의 무거움이 직접적으로 와 닿지는 않고 구보라는 인물이 더 잘 보인다. 이는 앞서도 밝힌 대로 소설의 서술방법 때문이다. 또 구보의 생각을 주로 전하다 보니 소재도 일상의 것들에 머무른다. 구보는 절절한 고독 속에 살면서 누구보다 강하게 행복을 갈망하는 자다. ‘구보는 얼마면 행복할 수 있을까’ 따위의 고민을 하지만 돈이 문제는 아니다. 그는 행복을 원하지만 그가 꿈꾸는 행복은 실체가 없다. 행복만큼이나 간절하게 의미를 찾아다녀 꺼내 든 동전의 숫자에서도 의미를 찾지만 역시 실체가 없긴 마찬가지다.
구보는 또 상대에게 다가가기보다는 생각만 하고 다가오길 바라는 자이다. 상대방을 두고 생각만 하기에 간혹 자신만의 왜곡된 생각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길 가다 만난 이를 보고 추측을 하고 간혹은 혼자만의 판단을 하기도 한다. 혼자만의 생각이 인식을 방해하는 경우는 특히 여자 생각을 할 때나 친구를 만날 때이다. 구보는 아는 이를 만나면 먼저 인사하길 꺼린다. ‘저 여자는(친구는) 어차피 나를 기억 못 할 거야’라고 하며 담담한 척 하지만 누구보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내가 다가가면 저 여자는 불행해질 거야.’라는 체념 섞인 말에서도 그의 쓸쓸함이 느껴졌다. 위축된 자기 인식이 원활한 관계를 방해한다.
구보와 서울 일대를 걷고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동안 안쓰러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 그의 망설이는 성격과 자기 인식이 마치 나의 경우와 같아 더욱 그랬다. 하지만 교양 있는 이와 천한 이를 나누고 음료 취향에서도 고귀와 비천을 따지고 있을 때는 어쩔 수 없는 지식인의 한계가 보이기도 했다. 카페 여급들과 어울리면서 ‘차라리 무지가 기쁨이다.’라는 등의 생각을 하고 의학사전에서 본 병명을 읊어대며 묘한 우월감을 느낄 때도 철저히 지식인의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구보의 방황은 새벽 나절까지 이어진다. 그는 어둠을 맞이하고부터 안정을 갈망하고 자신도 생활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시간이 더 늦어지자 그는 어머니 생각도 하며 어머니의 아픔에 공감하고 안쓰러운 마음을 가진다. 그는 이내 ‘나는 생활을 가지리라.’ ‘내일부턴 집에 있겠소, 창작을 하겠소.’라고 하며 정착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는 집에 있으면서 생활을 갖고 또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혼인도 할 것 같다. 소설도 쓰겠다고 하니 방황은 했지만 꿈은 버리지 않은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사실 특별한 서사가 없는 이 작품이 재미있지는 않았다. 단조롭고 지겹기도 했다. 하지만 구보라는 인물에게 자꾸 마음이 쓰였다. 소설 속에서 상상한 구보의 얼굴도 떠오르고 ‘구보’가 작가 박태원의 호라고 하니 박태원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마지막 구보의 결심이 정말 안정을 찾은 것인지 세상과 적당히 타협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타협보단 안정을 찾은 것이었으면 좋겠다. 만약 타협이라 하더라도 구보에게 ‘구보야. 타협도 좀 하고 그럼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이는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글을 갖고 돌아왔습니다. 일부러 쓰지 않았다기보다는 이번 학기가 너무 정신없고 바빠서 글을 쓸 물리적인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겨우겨우 종강을 한 후 넉다운이 되어 있다가 주섬주섬 정신을 차리는 중입니다. (사실 지금 올린 글도 '새 글'은 아니고 제출한 과제 중 하나라는 점은 안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