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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Oct 23. 2019

수학여행 추억은 없습니다

나는 수학여행 전날 비가 오길 빌었다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을 다녀온 다음날 학교 갔을 때의 적막감을 기억한다. 촉이 좋아서 분위기를 잘 감지하는 편인데 그날 아침은 뭔가 이상했다. 교실에 들어섰을 때 낯설고 어색했던 기분이 생생해글을 쓰는 지금의자에 가방을 걸다 말고 교실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은 아무도 나에게 그 이상한 분위기의 원인 말해주지 않았고 나중에 같은 반 학생 A의 어머니를 통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수학여행에서 우리 반이 탔던 차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고 사고로  경미하게 다친 아이들은 병원에 다녀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수학여행을 가는 길이었고 큰 사고는 아니어서 일정은 그대로 소화했지만 사고의 충격은 여행이 끝난 뒤에도 여전했다.


수학여행길에 사고가 난 사실 몰랐던 이유는 내가 그해 수학여행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등학교 마지막 여행에 가지 않은 이유는 내가 왕따여서였다. 학교에서 외톨이가 된 것은 차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고 그냥 덤덤하게 꾸준히  학교를 다녔는데 그 해에는 적응을 하기가 힘들었나 보다. 그 무렵이 돼서는 어머니도 대강의 사정을 알고 계셨기에 수학여행에 가고 싶지 않은 기색을 내비치는 내게  "가기 싫으면 가지 마라. 엄마가 선생님한테 전화해줄게."라고 하셨다.


4학년이 끝날 무렵 서울로 전학을 와서 같은 반 친구들을 3일 정도 만고 5학년 올라갔다. 내 사회성이 부족해서였는지 그 시기 아이들은 으레 그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미 머리가 커진 5학년 아이들은 새로 온 전학생과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집안 사정으로 전학이 잦았고 4학년 2학기 때 전학 간 학교에서 이미 그런 경험을 했었기에 그냥 '학교란 그런 곳이려니' 하고 다녔다.


등학교 6학년 즈음에는 제법 익숙해져서 소풍 가는 버스 안에  '멋쩍어서 화끈해진 얼굴을 감추며 혼자 앉아가는 일'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수학여행지에서 나 혼자 주류 학생들의 방에 배정되어 꿔다 논 보릿자루모양으로 들어가 있는 일도 잘 해낼 수 있었다. 나름대로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나도 겨우 13살짜리 아이였어서 그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던 것 같다. 매일매일이 조마조마해서 터질 것 같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므로.


잠깐 지면을 빌어 왕따였던 내가 잘 나가는 학생들과 방을 같이 쓸 수 있었던 이유를 밝혀보자면 이다. 여학생은 두 방에 나누어 들어가곤 했는데 반에서 소위 잘 나가는 학생들 7-8명이 한 방을 차지하고 나면 자연스레 남은 방에는 '잘 나가지는 않지만 교우관계는 좋은'아이들이 들어가게 된다. 방 안에 인원이 균형 있게 들어가야 하므로 나와 같은 '지질한 계열*’ 학생 몇은 '잘 나가는 아이들'과 방을 쓰게 된다. 그 방에서는 언니들(?)이 밤새 진실 게임을 하며 떠드는 동안 구석에 누워 자는 척을 하면 된다. 가끔 “ㅇㅇ아 저기 드라이기 좀 갖다 줄 수 있니?”라고 친절하게 이름까지 부르며 부탁을 하면 아주 기꺼운 표정으로 요구를 들어주는 부업도 한다.


참 이상했던 일은 수학여행에서 사고를 피한 내가 그 이후 교실 안에서 죄인 비슷한 역할을 게 되었다는 점이다.  '눈엣 가시 같은 저  X이 겁도 없이 수학여행에 오지 않았고, 저  X이 오지 않은 탓에 사고가 났다.', '재수가 없는 저  X은 역시 우리 반이 아니다.', '쟤는 용케도 피했다. 역시 재수가 없다.' 전혀 인과관계가 없는 말이지만 그 당시 교실에서는 그런 말들이 통했다.  재밌는 일은 '수학여행길에 우리 반이 접촉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내가 알아서 기었다는 점이다. 이유 없이 미안해했고, 주눅이 들었고, 눈치를 살폈다. 아이들이 언짢은 기색을 비치기도 전에 미리 내 역할을 잘 해냈다.


비굴하긴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교실 안에서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문제 상황이 발생하면 인과를 따지기도 전에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미안하다고 선수를 치는 것은 내가 책임감이 남달라서도 겸손하거나 배려심이 깊어서도 아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듯 어릴 때 살기 위해 부린 요행을 지금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수업 전에 짬을 내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갑자기 화가 난다.'는 생면부지 타인의 말에 괜히 뜨끔함을 느끼는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글을 쓰면서 '지질한 계열'이라는 차별 표현을 쓴 것에 양해를 구합니다. 학교폭력 피해자일 뿐 특유의 성향

 이나 겉으로 보이는 모양이 문제는 아닙니다만 당시 학교 분위기를 살려 쓰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사용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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