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 추억은 없습니다
나는 수학여행 전날 비가 오길 빌었다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을 다녀온 다음날 학교에 갔을 때의 적막감을 기억한다. 촉이 좋아서 분위기를 잘 감지하는 편인데 그날 아침은 뭔가 이상했다. 교실에 들어섰을 때 낯설고 어색했던 기분이 생생해서 글을 쓰는 지금도 의자에 가방을 걸다 말고 교실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은 아무도 나에게 그 이상한 분위기의 원인을 말해주지 않았고 나중에 같은 반 학생 A의 어머니를 통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수학여행에서 우리 반이 탔던 차가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고 사고로 경미하게 다친 아이들은 병원에 다녀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수학여행을 가는 길이었고 큰 사고는 아니어서 일정은 그대로 소화했지만 사고의 충격은 여행이 끝난 뒤에도 여전했다.
수학여행길에 사고가 난 사실을 몰랐던 이유는 내가 그해 수학여행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등학교 마지막 여행에 가지 않은 이유는 내가 왕따여서였다. 학교에서 외톨이가 된 것은 어차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고 그냥 덤덤하게 꾸준히 학교를 다녔는데 그 해에는 적응을 하기가 힘들었나 보다. 그 무렵이 돼서는 어머니도 대강의 사정을 알고 계셨기에 수학여행에 가고 싶지 않은 기색을 내비치는 내게 "가기 싫으면 가지 마라. 엄마가 선생님한테 전화해줄게."라고 하셨다.
4학년이 끝날 무렵 서울로 전학을 와서 같은 반 친구들을 3일 정도 만나고 5학년에 올라갔다. 내 사회성이 부족해서였는지 그 시기 아이들은 으레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미 머리가 커진 5학년 아이들은 새로 온 전학생과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집안 사정으로 전학이 잦았고 4학년 2학기 때 전학 간 학교에서도 이미 그런 경험을 했었기에 그냥 '학교란 그런 곳이려니' 하고 다녔다.
초등학교 6학년 즈음에는 제법 익숙해져서 소풍 가는 길 버스 안에서 '멋쩍어서 화끈해진 얼굴을 감추며 혼자 앉아가는 일'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수학여행지에서 나 혼자 주류 학생들의 방에 배정되어 꿔다 논 보릿자루모양으로 들어가 있는 일도 잘 해낼 수 있었다. 나름대로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나도 겨우 13살짜리 아이였어서 그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던 것 같다. 매일매일이 조마조마해서 터질 것 같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므로.
잠깐 지면을 빌어 왕따였던 내가 잘 나가는 학생들과 방을 같이 쓸 수 있었던 이유를 밝혀보자면 이렇다. 여학생은 두 방에 나누어 들어가곤 했는데 반에서 소위 잘 나가는 학생들 7-8명이 한 방을 차지하고 나면 자연스레 남은 방에는 '잘 나가지는 않지만 교우관계는 좋은'아이들이 들어가게 된다. 방 안에 인원이 균형 있게 들어가야 하므로 나와 같은 '지질한 계열*’ 학생 몇은 '잘 나가는 아이들'과 방을 쓰게 된다. 그 방에서는 언니들(?)이 밤새 진실 게임을 하며 떠드는 동안 구석에 누워 자는 척을 하면 된다. 가끔 “ㅇㅇ아 저기 드라이기 좀 갖다 줄 수 있니?”라고 친절하게 이름까지 부르며 부탁을 하면 아주 기꺼운 표정으로 요구를 들어주는 부업도 한다.
참 이상했던 일은 수학여행에서 사고를 피한 내가 그 이후 교실 안에서 죄인 비슷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점이다. '눈엣 가시 같은 저 X이 겁도 없이 수학여행에 오지 않았고, 저 X이 오지 않은 탓에 사고가 났다.', '재수가 없는 저 X은 역시 우리 반이 아니다.', '쟤는 용케도 피했다. 역시 재수가 없다.' 전혀 인과관계가 없는 말이지만 그 당시 교실에서는 그런 말들이 통했다. 더 재밌는 일은 '수학여행길에 우리 반이 접촉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내가 알아서 기었다는 점이다. 이유 없이 미안해했고, 주눅이 들었고, 눈치를 살폈다. 아이들이 언짢은 기색을 비치기도 전에 미리 내 역할을 잘 해냈다.
비굴하긴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교실 안에서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문제 상황이 발생하면 인과를 따지기도 전에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미안하다고 선수를 치는 것은 내가 책임감이 남달라서도 겸손하거나 배려심이 깊어서도 아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듯 어릴 때 살기 위해 부린 요행을 지금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수업 전에 짬을 내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갑자기 화가 난다.'는 생면부지 타인의 말에 괜히 뜨끔함을 느끼는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글을 쓰면서 '지질한 계열'이라는 차별 표현을 쓴 것에 양해를 구합니다. 학교폭력 피해자일 뿐 특유의 성향
이나 겉으로 보이는 모양이 문제는 아닙니다만 당시 학교 분위기를 살려 쓰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사용했습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