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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Oct 21. 2019

터진 포도알

포도를 먹다가 든...'짧은 생각'

포도를 먹다 보면 간혹 맛이 변한 포도알을 만나게 된다. 포도주도 아닌 것이 식초도 아닌 것이 묘하게 불쾌하다. 그런 포도알을 만나면 혀에 닿자마자 뱉어버리지만 그 맛은 강렬해서 포도 먹는 기분을 망치곤 한다. 특히나 상한 포도알이 내가 먹는 마지막 포도알이라면 '포도를  새로 하나 씻어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상한 포도알은 대개 껍질이 갈라져 있기 마련이므로 껍질이 갈라져있고 묘한 인상을 풍기는 포도는 먹지 않고 놔두게 된다.


그런데 어제 먹은 포도는 껍질이 갈라져 있으면서도 맛이 좋았다. 어쩐 일인지 그 뒤로 갈라진 포도알을 네 개나 먹었는데도 상한 포도알은 걸리지 않았다. 불안해서 갈라진 포도 사이로 혀를 살짝살짝 대 보았는데 신선한 맛이 나길래 그냥 먹었고 결과도 좋았다. 상해서 껍질이 터진 것이 아니라 씻는 과정에서 껍질이 갈라진 것인가 보다. 그러다 문득 '나는 나의 삶을 '상해서 터진 포도알을 내내 먹어 온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살면서 단 한 번도 상한 포도알을 만나지 않았다면 껍질이 갈라진 포도 앞에서 한참 고민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괜히 서글픈 생각이 든다.


대학원 입학 전에 타학교에서 조교일을 했다. 산학협력단에 서류를 내러 가는데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뭘 그렇게 조심스럽게 들어오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머쓱하게 웃고 말았지만 씁쓸한 웃음이었다. 공교롭게도 다음날 다른 사무실에 갔을 때도 '왜 저렇게 조용히 들어와?' 하는 소리를 들었다. 직접 들었다기보다 사무실 일을 보고 나오다가 닫히는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가슴이 두근거리고 며칠 동안 기분이 다운되었던 기억이 난다. 별 것 아닌 말인데 그랬다.


감정형 인간이고 섬세한 편이라 상대의 감정을 더 크게 느끼는 탓에 살면서 만나는 '힘든 사람들'에게 내성이 잘 생기지 않는다. ('예민하다'라는 단어 대신 '섬세하다'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나를 사랑하기 위한 한 단계이다.) 상한 포도알을 뱉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굴리면서 시큼한 물을 쪽쪽 빨아먹은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몸이 알아서 방어적 자세를 취한다. 사무실에 들어가면서 잔뜩 긴장해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내가 주눅 든 모양새를 보면 더 화가 난다며 더 닦아세우던 이도 있었는데 '그는 진정 후배에게 좋은 포도알만 먹이고 싶은 사람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먹지 않고 놓아둔 포도알 중에는 달콤하고 싱싱한 포도가 더 많지 않았을까. 지나간 포도알들은 어떤 맛이었을까. 맛있는 포도를 맛 볼 기회를 더 접하기 위해 터진 포도도 다시 봐야겠다. 이 정도면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을 앞두고 쓰기에 괜찮은 글이 아닌지.



브런치를 위해 새로 포도를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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