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호 Oct 27. 2019

자연과 인간이 빚어내는 풍경

백석 시인의 '박각시 오는 저녁'감상

 ‘저녁’이라는 시간은 보통 ‘조용한 때’ 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뒷등성에서 자연과 인간이 빚어내는 풍경은 그렇지 않다. 생동감 있고 다채롭다. 



박각시 오는 저녁      

                                    백석     

당콩밥에 가지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백석의 시를 접하면서부터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백석의 시는 읽을 때마다 늘 새로운 울림을 준다. 처음 접한 백석의 시들은 짙은 그리움이 묻어나는 시였다. 낯선 방언이 주는 생경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지는 쓸쓸하고 애잔한 감정이 시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박각시 오는 저녁」은 그동안 읽었던 시들과는 조금 달랐다. 애잔한 정서보다는 시 안에 고스란히 담긴 여름밤의 아름다운 풍경을 통해 감동을 주고 있었다. 구체적인 장면을 잘 형상화하는 점이 백석 시의 특징 중 하나이지만 「박각시 오는 저녁」에는 강한 서정성이 깃들여져 이전과는 다른 특별한 체험을 하게 한다.


시의 전반에 가장 두드러진 이미지는 하얀색이다. 하얀 박꽃이 지붕 위에 피어있는데 여름밤에 흰 꽃이 피어있는 풍경은 그 자체로 서정적이다. 하이얀 박꽃 주변에는 박각시와 주락시가 날아든다. 시의 제목에 쓰인 소재이기도 한 박각시는 밤에 피는 박꽃의 꿀을 빨러 날아드는 곤충이다. 주락시 또한 줄박각시로 박각시 나방의 일종인데 백석은 유사한 종류임에도 고유한 명칭을 사용하여 장면을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뒤이어 이어지는 ‘붕붕’은 박각시 나방의 날갯짓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로 풍경 안에 소리를 더해주고 이로써 풍경은 좀 더 구체성을 띠게 된다. 


박꽃과 박각시 나방 등 자연이 어우러진 풍경에 인간들이 등장한다. ‘당콩밥’과 ‘가지냉국’으로 저녁을 먹은 인간들은 집의 안팎 문을 횅하니 열어 젖기더니 이내 뒷등성으로 나온다. 멍석 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는 인간들은 이미 자연 안의 한 풍경이 되었다. 시 안에서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대림질감이란 당시 인간들이 입던 흰옷을 뜻한다. 인간들이 입은 ‘하이얀’ 옷은 바가지꽃의 '하이얀' 빛깔과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이 멍석자리를 한 풀밭 주변에서 돌우래와 팟중이들이 울어댄다. 돌우래는 땅강아지의 평북방언이며 팟중이는 메뚜깃과의 곤충이다. 이들은 산 옆이 들썩하도록 울어대는데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풍경 안에 소리를 더한다. 백석은 단순히 풀벌레라고 통칭하지 않고 돌우레와 팟중이라는 곤충명을 직접 제시하는데 감상자는 이를 읽으며 이 둘의 소리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로 다른 종류의 곤충이 울어대는 소리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데에 더욱 효과적이며 풍경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앞서 시 안에서 인간과 자연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마지막 두 행에서는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더욱 극대화되고 있다.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강낭밭에 이슬이 비오듯’ 하는 풍경은 하늘로 대변되는 자연과 강낭밭으로 대변되는 인간이 자연스레 어우러지고 있음을 뜻한다. 하늘에는 별이 마치 잔 콩처럼 떠있다. 인간의 옥수수밭에는 하늘에서 이슬이 비 오듯이 내린다. 인간의 사물이 하늘로 올라가고 자연의 것이 인간들에게 내려온다. 그 안에서 박각시와 돌우래 팟중이들은 꽃의 꿀을 빨기도 하고 산 옆이 들썩하도록 울어대기도 한다. 


‘저녁’이라는 시간은 보통 ‘조용한 시간’ 일 것이라 생각되지만 뒷등성에서 자연과 인간이 빚어내는 풍경은 그렇지 않다. 생동감 있고 다채롭다. 감상자는 시를 읽으며 이러한 풍경 안에 함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감정의 동요까지 느낀다.


시는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정경을 아름답고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시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장치는 앞서 밝힌 구체적인 곤충명의 제시나 ‘하이얀’과 같은 감각적 언어, 의성어의 사용 등이다. 이에 더불어 시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당콩밥’과 ‘가지냉국’이라는 음식명도 구체성을 더하고 특유의 효과를 거둔다. 음식은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소재이다. 가장 기본적이며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음식을 제시하여 인간의 삶을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강낭콩밥과 가지냉국은 소박한 음식인데 이러한 소박함은 뒤에 이어지는 풍경과 조화를 이룬다. ‘하이얀 박꽃’이나 뒷등성에 자리를 펴고 바람을 쐬는 행위 등은 모두 소박하고 정감 있는 풍경이다.


시를 감상하며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정경 안에 속해있는 체험을 했다. 풍경이 매우 아름다워 환상적인 기분까지를 느끼게 되는 시이다.



백석의 시에 평북 방언이 많기 때문에 해석이 어렵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백석을 좋아하는 저의 경우엔 낯선 언어 자체가 주는 생경함에서마저 매력을 느끼므로 어려운 방언들에서 도리어 시 읽는 맛을 느낍니다. 

해석이 다소 어렵더라도 시 자체를 읽으며 낯선 언어 자체가 주는 매력을 느껴보시고 그 이후에 아래에 첨부한 단어의 뜻을 찾아보고 읽으셔도 좋습니다. 단어를 먼저 공부(?)하고 감상하셔도 물론 좋습니다. 백석을 좋아하므로 좀 더 자랑을 해보자면, 그가 시 안에서 쓴 언어가 워낙 다채로워 시 속 단어들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는 점까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밖에 더 많지만 오늘은 그냥 지나가고 다음 기회에 좀 더 풀어보겠습니다. 

*『백석 시의 물명고』( 고형진, 고려대학교 출판부, 2015.)에서 단어 뜻을 찾아 적었습니다.


[시어 풀이]

박각시

나비목 박각시과에 속한 곤충. 몸의 길이는 5센티미터 정도, 편날개의 길이는 10센티미터 정도이며, 앞날개에는 짙은 회갈색의 무늬가 있고 뒷날개에는 회색에 검은 줄무늬가 있으며 배의 각 체절에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 가로띠가 있다. ‘박각시’는 주로 밤에 피는 박꽃의 꿀을 빨기 위해 모여든다. 그래서 박의 수분을 돕는다하여 이 곤충에 ‘박각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당콩밥

당콩(강낭콩)을 넣어 지은 밥. ‘당콩’은 강낭콩의 북쪽 지역 언어

가지냉국

여린 가지를 쪄서 젓가락으로 찔러 가늘게 가르고 파, 마늘, 고춧가루, 간장, 식초 등으로 무친 다음 간을 맞춘 장국에 부어 만든 음식.

바가지꽃

박꽃. 박의 꽃. 하얀색으로 여름에 피는데 저녁에 피었다가 아침에 누렇게 변색이 되며 시든다.  박꽃은 박각시나방(박각시)이 수분을 한다.

주락시

 ‘줄박각시’를 가리키는 말로 짐작된다. ‘줄박각시’는 박각싯과의 곤충으로 편날개의 길이는 6.8~7.2센티미터이며, 몸은 녹갈색이고 등과 배에는 어두운 색의 세로줄이 몇 개 있다. 앞날개는 누런 갈색, 뒷날개는 검은 갈색이다.

붕붕

벌 같은 곤충 따위가 날 때 잇따라 나는 소리.

뒷등성

뒷등성이. 뒤에 있는 산등성이.

멍석자리

자리로 쓰는 멍석, 또는 멍석을 깔아놓은 자리.

대림질감 

다림질감. 다리미질을 할 천이나 옷.

한불

하나 가득. ‘불’은 묶음이나 횟수를 나타내는 단위명사.

돌우래

도루래. ‘땅강아지’의 평북방언. 땅강아짓과의 곤충. 축축한 땅 속에서 산다. 몸의 길이는 2.9~3.1센티미터이며, 몸 빛깔은 노란 갈색이나 검은 갈색이고, 온 몸에 짧고 연한 털이 촘촘히 나 있다. 날개는 짧으나 잘 날며 앞다리는 땅을 파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낮에는 땅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밤에 기어 다니면서 식물의 땅속 부분을 갉아먹거나 파헤치며 끊어 놓는다. 

팟중이(팥중이)

메뚜깃과의 곤충. 몸의 길이는 3.2~4.5센티미터이고, 몸은 콩중이와 비슷하나 그보다 작다. 몸빛은 팥색깔과 비슷한 검은 갈색에 앞가슴 가운데 ‘X'자 모양의 연한 무늬가 있으며, 날개는 검은 갈색이고  앞날개에 잿빛 누런색 무늬가 있다. 한국,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들썩하다

붙어있던 물건이 쉽게 떠들리다. 또는 그렇게 되다.(들썩: 시끄럽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양)

잔콩

1.가늘고 작은 콩 2.팥의 방언(함북)

강낭밭

강냉이(옥수수)를 심은 밭. ‘강낭’은 ‘강냉이’(옥수수)의 방언.(평안, 경상)


매거진의 이전글 순간, 일상이 분주해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