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걸으려 해도 내리막에서는 속도 조절이 안되었다. 발 끝에 힘이 점점 들어가니 종종걸음을 치게 되고 발동작은 점점 빨라져 이내 뛰어 내려가게 된다.
비탈과 아이
문태준
비탈길이 궁금한 아이가 있다
아이가 비탈길을 뛰어내려오고 있다
점점 뺨이 터질 듯이 웃는다
천둥이 남쪽 하늘로 구르듯이
무른 가슴을 구르는 게 있는가
초승달이 매일매일 커지듯이
앙가슴에 자라나는 흰빛이 있는가
계속 기울어져 내 쪽으로
쏟아질 듯 뛰어내려오고 있다
저 흘러넘침을
나는 어떻게 받아안을 것인가
바위처럼 박히어 있는 나는
문태준,『먼 곳』 , 창작과 비평사
가끔 아이들을 보다가 그들이 낯설어지는 때가 있다. '어쩜 저렇게 생동감이 넘칠까? 어쩌면 저렇게 내내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는 걸까?' 노는 재미보다 다쳐서 무릎까지는 게 무서웠고 혹여 땅이 꺼질까 겁이 나 살살 걸어만 다녔던 어린아이가 그대로 자라 어른이 되었으니 뛰어노는 아이들이 낯선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나도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면 뛰어서 내려갔다. 천천히 걸으려 해도 내리막에서는 속도 조절이 안되었다. 발 끝에 힘이 점점 들어가니 종종걸음을 치게 되고 발동작은 점점 빨라져 이내 뛰어 내려가게 된다. 어린 다리 근육이 따라주지 않아 그랬겠지만 뛰려고 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딛는 발은 불안정하고 심장은 점점 빨리 뛰었다. 뛰다 보면 진동이 생겨 양 볼이 흔들리게 되는데 그 진동이 간지러워 터질 듯이 웃으며 평지에 다다르기도 했다. 뛰어내려오고 나면 뛰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다리는 후들거리고 심장은 터질 것 같고 상기된 뺨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간 시 감상문을 쓰면서 나의 경험을 이렇게 길게 서술했던 적은 드물었다. 그저 시를 감상하는 데에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조금 덧붙였을 뿐인데 어떤 경험이나 감정을 보태었다가 그 자체로 완전한 시에 오점을 남길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태준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비탈을 뛰어내려오는 정황을 이렇게 생동감 있게 전할 수가 있을까. 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비탈을 뛰어내려오는 아이가 되기도 하고 이제는 뛸 필요가 없는 어른이 되어 아이를 바라보게도 된다.
첫 연에서부터 '비탈이 궁금한 아이가 있다'라고 표현하는데 아이가 뛰어내려오는 단순한 광경을 '비탈이 궁금해서 뛰어내려온다'라고 서술하여 눈길을 끈다. 무엇이나 재미있어하고 신기해하는 아이들이므로 그런 아이의 모습 자체가 '무언가를 궁금해하는 이'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뛰는 일에 열중해서 내려오는 아이의 모습이 열심한 탐구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그렇기도 할 것이다. 어떻게 이해해도 좋지만 감상자는 첫 연에서부터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낀다.
이후 이어지는 시구들도 감상자로 하여금 벅차오르는 체험을 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무른 가슴을 구르는 천둥'혹은 '매일매일 커지는 초승달'은 참신한 표현은 아니지만 비탈을 뛰어내려오는 아이의 모습과 어우러져 특별한 감흥을 느끼게 한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여 매 순간 호기심이 솟아나는 아이의 마음을 닮은 표현이기도 하다. 시가 이어지면서 비탈을 내려오는 아이의 빨라지는 심장 소리와 더불어 가슴 벅찬 감정도 고조된다. 그런 아이의 모습은 흘러넘치려는 물과도 같아 곧 쏟아져 내릴 것 같다.
시 감상을 길게 적었지만 그저 편하게 읽어보는 것만으로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고 정서적 감흥을 얻을 수 있는 시이다. 시를 읽는 것만으로 정경을 떠올리게 하고 '뛰는 아이'의 심정이 되어보게 한다. 시적 화자는 바위처럼 박히어 있다고 하지만 분명 좀 뛰어본 어른일 것이다. 좀 뛰어본 어른이므로 좀 벅차긴 하더라도 쏟아질 듯 흘러내려오는 아이를 받아 안아 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