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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Nov 07. 2019

아름답지 않은 것이 시가 되다

나희덕 시인의 '잠을 들다' 감상

잠이라는 빵을 그는 어제 아침부터 뜯어먹고 있다



잠을 들다


                                                         나희덕


잠이라는 빵을

그는 어제 아침부터 뜯어먹고 있다

삼복더위에 솜잠바를 입고

시장 입구 버려진 철제 캐비닛에 기대어

하염없이 하염없이 잠을 들고 있다

건어물상을 나와 정육점에 들어갔던 파리는

과일가게 앞 쪼개놓은 수박의 붉은 살 위에 앉았다가

그의 콧잔등에 날아와 잠을 빨아먹고 있다

그러나 굳게 닫힌 그의 두 눈은

잠을 삼키느라 여념이 없고

마를 대로 메마른 입술은

잠을 씹느라 움직일 줄을 모른다

그의 팔다리 역시

고픈 잠이 아직 남아 있는지

녹슨 캐비닛보다 더 굳게 잠겨 있다

그는 땀조차 흘리지 않는다

잠시도 잠들지 않는 시장 입구에서

그는 어제부터 잠 말고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너무 많이 먹은 사람처럼

이따금 입 밖으로 흰 액체를 흘려보낸다

그를 둘러싼 공기들이 석회질처럼 굳어간다


                                  창작과 비평사, '어두워진다는 것'



시를 읽는 이유를 묻는다면 대부분 정서적 위로를 얻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시의 소재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감상자의 정서적인 위로를 위해서라면 '아름다운 것들'이 시의 소재가 되어야 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미적 체험은 인간의 정서를 풍요롭게 한다. 시에 사랑이야기가 많은 이유도 사랑은 본질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소재가 된 '잠을 든 걸인'은 아름다운 인물인가? 쉽게 답을 할 수 없다. 잠을 들다가 결국 '죽음을 들게' 된 그의 처지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독특함을 넘어서는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시는 아름답지 않지만 필자의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었다. 어떤 시는 표현 자체가 탁월해서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냉정하게 따져볼 때 이 시의 표현은 평범한 축에 속한다. 이 시를 마음에 남는 시가 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처음으로 돌아가 시의 제목을 보자. 시의 제목은 '잠을 들다'이고 시 안에서도 그러한 표현이 반복된다. 보통 '잠을 자다' 혹은 '잠이 들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잠을 들다'라고 표기하면 의미야 통하지만 자연스러운 표현은 아니다. '들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잠이 생기어 몸의 의식에 작용하다"는 뜻과 "먹다(1. 음식 따위를 입을 통하여 배 속에 들여보내다)의 높임말"로 쓰이는 경우가 나오는데 시인은 의도적으로 '잠을 들다'라고 표현하여 중의적으로 읽히도록 한다. 실제로 시를 읽어보면 '잠이라는 것을 먹는 행위'를 연상케 하는 표현이 반복된다.


시적 자아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걸인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어제 하루 저녁 술을 먹고 잠든 사람이 아니다. 그가 오래도록 노상에서 잠이 들곤 했을 것이라는 점은 세 번째 연에서 알 수 있다. '삼복더위에 솜바지를 입고' 있는 그는 짧게 잡아도 지난겨울부터 거리 생활을 시작했을 테다. 시에서 묘사되진 않았지만 그의 솜바지는 때에 절어 반들반들해지지 않았을까. 반들반들할 만치 켜켜이 쌓인 때는 고단한 그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잠시도 잠들지 않는 시장 입구는 소란스러우나, 아무도 잠들지 않는 공간에서 홀로 잠이 든 그의 주변은 적막할 만큼 조용하다. 그는 '잠을 씹느라 움직일 줄을 모르'며 콧잔등에 파리가 와 앉아도 움직이지 않고 땀조차 흘리지 않는다. 그렇게 죽음과 같은 잠에 든 그는 서서히 굳어간다. 6연에서 '정육점의 고기들' -> '수박의 붉은 살' -> '그의 콧잔등'으로 이어지는 파리의 이동경로가 나타난다. 수박 과육을 '붉은 살'이라고 표현하여 동물의 살덩이를 연상케 하는데 바로 이어 나타나는 그의 콧잔등 역시 동물의 살덩어리에 다름없는 물질이 되어버린 것 같다. 낯설고 섬뜩해지기까지 하는 부분이다.


처음 글을 열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시는 아름답지 않다. 걸인의 처지가 안쓰럽게 느껴지다가 어느 부분에 이르러서는 섬찟함도 느끼게 된다. '그를 둘러싼 공기가 석회질처럼 굳어가'듯 감상자의 인식체계도 당황스러움과 낯섦 그리고 약간의 불쾌감을 맞이한다. 하지만 시는 우리가 꺼려하고 지나치던 것을 직면하게 하여 정신을 각성시킨다. 시인도 아니면서 시인의 책무를 운운하기가 죄송하나 남들이 관심 두지 않는 부분을 예리하게 바라볼 줄 아는 이들이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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