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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Oct 24. 2019

순간, 일상이 분주해졌다

문태준 시인의 '가을 창가' 감상

일상을 일순간 화려하고 분주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진다.
풀벌레 소리가 쏟아진다. 풀벌레 물벼락이다.




가을 창가


                                                                              문태준


늦은 저녁밥을 먹고 어제처럼 바닥에 등짝을 대고 누워 몸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산굽이처럼 몸을 휘게 해 둥글게 말았다 똥을 누고 와 하던 대로 다시 누웠다


박처럼 매끈하고 따분했다 그러다 무심결에 창가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천천히 목을 빼 들어올렸다 풀벌레 소리가 왔다


가을의 설계자들이 왔다


저기서 이쪽으로, 내 귀뿌리에 누군가 풀벌레 소리를 확, 쏟아부었다


쏟아붓는 물에 나는 흥건하게 갇혀 아, 틈이 없다


밤이 깊어지자 나를 점점 세게 끌어당기더니 물긋물긋한 풀밭 깊숙한 대로 끌고 갔다



                                                                                       문태준, 『먼 곳』, 창작과 비평사




이 시를 접하면서 가장 먼저 들어온 부분은 연 구분이었다. 한 줄이 한 연을 이루고 있었는데 다른 시에서는 자주 접해보지 않은 구성이었다. 다소 낯설기도 했지만 시를 읽어나가면서 이러한 구성이 시인의 탁월한 선택임을 깨달았다. 시 속 인물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연 구분으로 인해 감상자도 그의 시간 속도에 맞추어 시를 읽게 된다.

     

그는 ‘늦은’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바닥에 누워있다. ‘어제처럼’이라고 했으니 그의 여유 있는 일상은 최소 이틀은 지속되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슬로 모션 비디오를 떠올리게도 하고 어떤 의식을 치르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저 ‘뒹굴거렸다’ 한마디로 표현해도 될 것을 '몸을 뒤집었다가, 둥글게 말고,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고 단계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주목하게 된다.  


화자는 ‘똥을 누고’ 온 일까지 서술한다. 삶이 바쁘게 흘러갈 때는 나의 몸과 정신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잘 인지하지 않게 된다. 자극 앞에서 그저 그동안 해오던 대로 반응하게 된다. 순간순간 자동적으로 지각하고 반사적으로 행동한다. 화자가 배변활동까지 서술한 이유는 그의 일상이 '박과 같이 매끈하고 따분'했기 때문이다. 일상에 여유가 생기고 그에 더하여 다소 지루하고 따분해지기까지 하면 작은 행동도 인지하게 된다. 불면증으로 잠이 오지 않는 긴긴 시간 동안 주변의 모든 현상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경우와 같다.


그러던 와중 시적 화자의 일상을 일순간 화려하고 분주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진다. 풀벌레 소리가 쏟아진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다가 무릎을 모으고 앉아있던 화자는 풀벌레 물벼락을 맞게 된다.


요즘 도심에서 풀벌레 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으나 어느 해에 산속 집에서 잠깐 머물며 풀벌레 소리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풀벌레 소리는 생각보다 매우 경쾌하고 음량도 커서 잠을 조금 설치기도 했다. 재밌는 일은 풀벌레들이 저마다의 소리로 울다가 어느 순간 다 함께 약속이라도 한 듯 울기를 그친다는 것이다.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듯 조화롭게 그리고 열과 성을 다해 울다가 그친다. 그러므로 풀벌레 소리를 ‘쏟아붓는다’는 시 표현은 적절하다.


조용히 소리가 그쳐있다가 갑자기 풀벌레들이 울기 시작하면 정신이 없어진다. 예상을 하고 있는 일이라도 놀랄진데 시적 화자처럼 무료하던 차에 그런 소리를 들으면 더욱 놀랄 것이다. 시적 화자는 '쏟아붓는 물에 (...) 흥건하게 갇혀' 빠져나갈 '틈이 없다'. 풀벌레 소리에 흥건하게 갇혔던 시적 화자는 이내 풀밭 깊숙한 데로 끌려 들어간다. 그들과 완연히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중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자주 나오는 표현을 쓰자면 '물아일체'의 순간이다.     


이 시를 읽으며 백석의  ‘박각시 오는 저녁’이 떠올랐다. ‘박각시 오는 저녁’은 여름날의 정경을 묘사한 시인데 시 속 색감의 묘사가 탁월하고, 더불어 ‘인간’과 박각시, 주락시 등 곤충으로 대변되는 '자연’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이 시를 쓸 때 시인이 백석의 시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추측을 하게 된다. 따분함을 표현하면서 '박'을 가져오는 경우를 보아도 그렇다. 백석의 시에서 '박'은 시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요긴한 소재이다. 문태준 시인은 물론 '박'으로 다른 시상을 끌어내고 있다. '좋은 시는 좋은 시를 낳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쩐 일인지 요즘 글을 쓰면서 '적막'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풀벌레 소리로 잠을 설치는 일 없이 숙면을 취하는 밤이 고맙다가도 간혹 그 적막함을 벌레소리가 잠을 깨워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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