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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Nov 05. 2019

캐럴, 가사가 억울하다.

좀 울 작정으로 '밑밥을 깔아봅니다.'

불편한 크리스마스 캐럴. '벌써, 아니 또 크리스마스 타령이라니. 한 가지 소재를 떠올리고 글을 쓰고 있으면 그 소재가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가져올 때가 있다. 때 이른 타령이라 넣어두려 했는데 작가의 서랍 속에 여타의 글들을 좀 이어보려 해도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아 또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애인지
오늘 밤에 다녀가신대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 낼 때 장난할 때도
산타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대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리 마을을 오늘 밤에 다녀가신대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 낼 때 장난할 때도
산타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대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리 마을을 오늘 밤에 다녀 가신대
오늘 밤에 다녀- 오늘 밤에 다녀- 가신대
                                               (출처: 내 머릿속)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나는 저 가사가 불편하다. 내가 프로 예민러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도 들고 가사를 지은 사람이 '참 냉정한 어른이구나' 싶어 정이 안 간다. 간단하게 말해보자면 '애가 좀 살다 보면 울 수도 없고 그런 거지. 그것도 못하게 하나?' 정도가 될 것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더 덧붙이면 '어른이 되어서도 잘 우는 나 같은 사람'은 선물 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곡도 아마 외국곡일 텐데 원곡 가사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말 가사가 저렇고 우리 한국 어린이들은 저 노래를 들으며 자랄 터이니 저 곡의 가사만 따져보기로 한다. 노래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울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울지 마라'이다. 그 아래에 이어지는 가사는 더 가혹(?)한데 바로 아랫줄에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라는 가사를 덧붙여 '우는 아이=나쁜 아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버린다.


위와 같은 해석이 좀 과하다 생각이 들면 다음 연을 보자. '울지 말라'는 메시지에 더해 '짜증을 내지도 말고 장난을 하지도 말라'라고 한다. 산타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한다. 브런치에 글을 쓸 때 외에 자기를 드러내는 일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무섭기까지 하다. 과장을 좀 더 보태서 산타할아버지가 빅브라더도 아니고, 내가 판옵티콘에 갇힌 죄수도 아닌데 나를 다 알고 계시다니. '저기, 사생활 존중 좀......'


물론 앞에서는 표현을 다소 과하게 한 점도 있지만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는 게 그렇게 나쁜 건가. 내가 워낙 잘 울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울면 지는 것'이라며 절대 울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의 가르침(?) 덕에 드라마를 보다가도 슬픈 장면이 나오면 올라오는 눈물을 삼야 했다. 그런 경험이 유쾌하지 않았고 혼자 철 지난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현재의 상황이 더 편안하다. 언젠가도 잠깐 비쳤지만 사랑도 감정의 영역이라 사랑하는 마음을 죄책감 등 여타의 이유로 참다 보면 깊은 병이 들게 된다.


'운다'는 것은 단순히 지고 이기고의 문제만은 아니다. 물론 어른이 되면서 아무 데서나 울었다간 그야말로 '호구'가 되거나 직장상사에게 '유난스러운 애'로 찍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고 싶은 얘기는 좀 울어도 괜찮을 자유를 달라는 것이다. 웃음이 다 같은 웃음이 아닌 것처럼 울음도 다 같은 울음이 아니다. '울음'이라고 하면 슬픔이라는 감정을 가장 먼저 떠올리겠지만 억울해서 울 수도 있고 화가 나서 울 수도 있고 길을 가다 지는 달이 아쉬워서 울 수도 있다. 그냥 정말 슬퍼서 운다고 해도 엉엉 울고 나면 감정이 정리가 되는 부분이 있다.(물론 너무 많이 울면 머리가 아프다.)


맥락을 따져 저 가사를 읽어보면 '운다'는 것이 '짜증을 내고 떼를 쓰며 우는 일'을 가리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1년 365일 중에 하루쯤 짜증이 나면 짜증도 내고 떼도 좀 쓰고 그래야 건강한 어린아이가 아닌가. 심한 장난이어서 본인이 다치거나 상대방을 위협할 정도가 아니라면 장난도 좀 칠 줄 아는 어린이가 좋다. 개그도 다큐로 만들어버리는 건조한 사람보다 장난도 칠 줄 알고 유쾌한 사람이 되고 싶다. 선물을 포기해서 그런 어른이 될 수 있다면 선물을 포기하겠다.


작가의 크리스마스 병이 점점 심해지는 걸 보니 해가 일찍 지고 날이 쌀쌀해지긴 했는가 보다. 선물을 받기엔 연령 제한에 걸리겠지만 산타할아버지를 만나면 좀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제안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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