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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Nov 06. 2019

열정이요? 제가요?

열정에도 다양한 얼굴이 있다.

내가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얼마 전 대학원 동기와 글 쓰는 얘기를 하다가 '내가 속한 모임 사람들은 정말 열정적이라서 나는 발끝도 못 따라간다'는 말을 했더니 '언니도 충분히 열정적인데? 추웅~분 해요' 하는 대답이 아왔다. 나는 내 페이스대로 사는 편이다. 열정이라고 했을 때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와 내 모습은 다르다.


더군다나 나는 '열정'이라는 단어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다. 입시학원을 다닐 때 시뻘건 바탕에 갈겨 쓴 '투혼'글자가 찍힌 의자 커버를 씌우고 그야말로 열정적으로 공부를 하던 친구가 있었다. 안 보려 해도 강렬한 색깔을 하고 있어 자꾸 보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숨이 막혔다. 우리나라 입시를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싶지만 꼭 싸우는 마음으로 까해야 하나. 농담을 좀 보태면 나는 싸우는 게 싫어서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신념을 고수한다.  나열정적이라니.


그런데 따지고 보면 '열정'이 꼭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열정이라고 하면 목표를 세우고 촉각을 다투며 달리는 사람이 먼저 떠오르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자기 모습대로 최선을 다한다면 열정적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이 동기한테 어떤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는가 고찰해보니 다음의 몇 가지 모습이 후보로 나왔다.


1학기 때 좋아하는 시를 뽑은 후 시 관련 글을 쓰는 과제가 있었다. '좋아하는'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고 한 시인의 시집을 5권씩 빌려 읽으면서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찾았다. 대학원은 학부에 비해 점수를 잘 주는 편이어서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지만 좋아하는 분야인만큼 노력을 좀 보태고 싶었다. 읽어오라는 논문을 두 번씩은 읽고 정리한 뒤 글을 쓰거나, 한 페이지만 쓰라는 과제를 세 페이지씩 꼬박꼬박 해가는 일도 열정에 속한다면 속하겠다. 굳이 안 해도 되는 발표를 자원해서 하기도 한다. 지금처럼 정기적으로 글을 쓰려 애쓰는 일도 누군가의 눈엔 열정적으로 보일 수 있겠다.( 애쓴다 애써...)


적고 보니 비슷한 내용들이라 열정적으로 보이려 애쓰는 것 같지만 열정적이라고 해주고 싶다.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열정에는 '전략적인 태도'가 필요할 거 같은데 넓게 보면 나도 전략적이다. 매사에 성실하고 착실하려 애쓰므로 융통성이 없다는 평도 받지만 이는 내 나름대로의 자기관리 전략이다. 속이 훤히 보이는 지만 어느 구름에서 비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매사에 열심히 한다.(진짜 열정적이라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나요?)

'밥도 열심히 먹고, 열심히 커피도 먹고, 또 열심히 쇼핑도 하는'정음씨(from. 애인 이지훈)_출처:옛드:MBCClassic옛날드라마


열정적으로 사는 것이 '시간을 초단위로 나누고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음 것을 계획하며 사는 태도'만을 뜻한다면 자신이 없다. 꼭 그런 모습이 아니더라도 시작한 일 애써서 하고  똑댁이 해먹을 줄 알고 내 몸 내가 챙길 줄 알면 충분하지 않을까. 잠깐 일을 할 때 본가에서 나와 살면서 꼬박꼬박 아침저녁을 해 먹고 다녔는데 이것도 열정이 없으면 못할 일이라며 자기 변호를 해본다.


나의 글이 열정과는 거리가 먼 느림보의 넋두리처럼 읽힐 수 있겠지만 좀 너그러워지고 싶다. 평소 안 듣던 말을 들은 자의 내적 댄스를 글로 표현한 것이라 해도 좋다. '열정'에 거부감을 가진 것처럼 글을 썼지만 열정적이라는 말을 한 번쯤 듣고 싶기도 했다. 글에서 '촉각을 다투며 목표를 이루는 일'을 열정이라고 정의했는데 애초에 범주 설정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모두 생긴 모양대로 필요한대로 다 열정적이니 너무 기운을 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글이 거의 일기 수준이다. 깔때기처럼 모든 일이 자기 얘기로 모인다. 자기한테 너무 골몰하는 것 같지만, 변명을 해보자면 자기 상처가 치유되고 자기 얘기가 다 나와야 남에게 진심으로 공감도 수 있다. 쓰기도 마찬가지다. 에세이는 지극히 개인의 영역에 속하지만 에세이로 단련(?)을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을 쓸 수 있다. 그래서 좀 창피하더라도 그냥 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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