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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Oct 31. 2019

계륵 같은 글

브런치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글을 쓰려고 마음먹은 이유는? 두려워서.
앞으로 다가올 날들이. 잊혀갈 기억들이. 찰나의 번뜩임이. 사실 '글을 쓰기로 다짐한 것을 지켜야겠다'라고 생각한 것은 매우 현실적인 걱정 앞에서 불안을 잠재울 무언가를 잡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쓴다면 무언가 되어있지 않을까. 멘토가 되어주시는 교수님께 '하긴... 그때부터 썼으면요' 했듯이. 언젠가는 소설을 쓰고 싶은데 내가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라질까 봐...

"새벽 감성이지만 괜찮아"-뭐지 이 새벽스러운 제목은?

위의 인용글은 오래전 '필사 노트'에 적어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글이다. 의미가 안 통하긴 하지만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 필사 노트에 소설 문장이든 느낀 점이든 조금씩 기록하기로 결심을 하고 난 뒤 썼다. 저 글을 썼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지만 글을 접하고 보니 언제 썼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저 글을 늦은 밤에 자려고 누웠다가 일어나서 썼다. 자려고 누웠는데 잠은 올 기미가 안 보이고 정신은 자꾸만 총명해지고 감성이 올라와서 썼다. 말 그대로 새벽 감성이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새벽 감성인 탓에 조금 낯부끄럽고 의식의 흐름대로 쓰긴 했어도('의식의 흐름'기법은 이상의 소설을 배우며 처음 접하게 되는 개념인데 '의식의 흐름'이란 용어 하나가 나 같은 초보 글쟁이를 얼마나 구원해 주었는지 모른다. 써놓고 부끄러우면 '의식의 흐름'이라고 멋대로 내뱉었으니.-물론 의식의 흐름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지만)하고 싶은 말은 다 들어가 있다. 그리고 지금도 저 마음 그대로이다.


돌이켜보면 말보다 글을 선호하게 된 것은 타고난 성격 탓이다. 어디 가서 말을 하면 잘 들어주질 않으니 자연스럽게 어디 조용히 앉아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친구랑 싸우고도 멋쩍게 가서 '미안해'하면 풀어지곤 했는데 좀 심각하게 싸웠다 싶은 날은 글을 썼다. 편지에 내 마음을 구구절절 써서 전하면 만사 오케이였다. 학교를 좀 오래 다니느라 직장 생활은 많이 안 해봤지만 어디 가서든 자기소개서로는 반려를 당해본 적이 없다. 말을 할 때 '떨지 않을까' 혹은 '울지 않을까', '오해를 사지는 않을까' 고민하느니 앉아서 쓰는 게 편했다.


쪼무레기 작가지만 벌써-게을러진 건 아닙니다만...

브런치를 시작한 지 20여 일 되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글을 쓰자며 다짐했고 나름대로 실천에 잘 옮기고 있다. 그런데 가끔은 글감이 죽어도 떠오르지 않는 날이 있다. 이전에는 이것도 쓰고 싶고 저것도 쓰고 싶어서 메모장에 아이디어를 마구 적어놓는데 글을 못 쓰겠는 날은 모아 놓은 글감을 봐도 별로 감흥이 생기지 않는다. 일단은 정기적으로 쓰기로 마음먹었으니 '짧은 생각-약속을 지키기 위한 보험'이라는 제목으로 매거진을 하나 발행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무엇을 써야 할지 글감이 떠오르지 않고 도무지 글을 쓰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 날은 마음속에 무언가 욕심이 있는 날이다. 전날 우연찮게 쓴 글이 갑자기 조회수가 높아진다거나 '라이킷'수가 다소 올라가면 그다음엔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실망스러운 글을 써서 오셨던 구독자님들이 떠나갈까 봐 두렵기도 하다.


이제 겨우 시작한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내 글이 실망스럽고 부끄러울 때도 글을 쓸 맛이 나지 않는다. 어떤 글을 썼다. 브런치의 알고리즘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우연히 그 글이 브런치 메인 언저리에 기웃거렸었나 보다. 나 또한 그 글이 브런치에 기웃거리다 사라진 모습을 보았고, 오전에 잠깐 다음 메인에 보이다가 사라진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글을 읽은 사람 수는 많은 반면 라이킷 수가 정말 적었다. 나름대로 그 글로 브런치에 통과되었었고(물론 3개 중 하나였지만) 내 마음속에 나름 오래 남아있던 기억을 끄집어내 쓴 건데 자괴감이 들었다. 패인을 분석해보자면 글감이 너무 흔했고, 내 아픔에만 골몰했고, 흔하면 반전이 있거나 재미가 있거나 문장이 좋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도 아니었다.


며칠 전에도 브런치 메인에서 놀다가 문제의 그 글이 있는 것을 잠깐 봤고, 어떤 작가님 글 아래에 딸려서 소개된 것도 보았다. 통계 탭에 들어갔다가 그 글이 조회수 1위를 한 것을 보면 그 오묘한 기분을 어떻게 말을 할 수 없다. 제목만(!) 읽어보고 싶게 썼지만 어쨌든 독자님들이 클릭은 해보신 글이고 나름 꺾은선그래프를 다채롭게 만드는 데 일조를 한 공도 있다. 무엇보다 '언젠간 써야지'하고 혼자 생각한 이야기를 나름대로 진솔하게 쓴 글이다. 부끄러워서 글을 내릴까 생각하지만 그러기도 힘들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썼다고 내 자식 같아서 버리지도 못하겠다. 마치 계륵과 같다.


뜯어먹을 닭갈비가 작으면 닭 살을 찌우세요

계륵과 같은 그 글을 어떻게 할까. 같은 소재를 토대로 새로 구성한 글을 써볼까. 아니면 에라 모르겠다 과감하게 지워버릴까. 같은 소재로 재구성할 생각은 했지만 나는 아직 글의 구성력이나 창의력이 뛰어나지 않아서 고쳐 써도 그 나물이 그 나물일 거 같다. 지워버릴 용기 역시 생겨나질 않는다. 그래서 결국 그냥 두기로 했다. 부끄러운 과거도 내 과거이니. 하긴 생각해보면 그 글만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그런 글이 많은 걸 뭐. 하고 만다.


하나 이 '그냥 두겠다'는 다짐은 포기와는 결이 약간 다르다. 그냥 두는 대신 닭의 몸집을 불리기로 했다. 지금 내 브런치는 병아리 닭이므로 뜯어먹을 것이 적고 닭갈비(계륵)도 매우 작다. 여기서 실망하지 말고 살을 더 찌워서 중닭을 만들고 시골 씨암탉 크기까지 만들면 되지. 인터넷을 찾아보니 닭의 크기는 정말 다양하다. '닭 크기'라고 검색했을 때 '브라질 닭'이 뜨는 걸 보니 어마어마하게 큰 놈인가 보다. 브라질 닭은 좀 너무 큰 것 같으니 토종닭까지는 키워봐야 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시작한 글의 마무리가 치킨을 시켜먹고 싶게 만드는 것처럼 되어서 면구스러운 마음이 들지만 의미 있는 다짐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또 글쓰기를 지속할 에너지를 얻고 있다.


닭의 크기가 이렇게 다양하다고 합니다. 저 끝까지 한 번 가보죠.(출처: 저기 써있는대로" MBN  '고수의 비법 황금 알'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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