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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호 Oct 17. 2019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 뻗기

브런치, 이건 그래도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내 뒤에 서게 되는 사람은 답답할 것이다. 에스컬레이터이동 속도와 반 박자 어긋나게 발을 내미는 탓에 제 차례에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못하곤 한다. 내 덕에 뒷사람도 제 때에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 에스컬레이터에 재빨리 올라타지 못하는 이유는 타고난 운동신경과 반사신경(?)이 젬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모양이 '그냥 네 사는 방식 자체가 쭉 그래 왔다'는 점을 나타내 주는 상징 같아서 쓸하다.


어떤 일을 앞두고 자신이 없어 고민하고 앞뒤를 재느라 내 삶의 선택은 한 박자 씩 늦어졌다. 어서 시작해야 할 것을 제 때에 시작하지도 못하고, 얼른 끝내고 손을 떼야할 일을 떼지도 못해 조금씩 더 늦은 사람이 되었다. 선택이 조금씩 늦었으면 하고 싶은 일이라도 빨리빨리 찾아 도전해야 할 텐데 그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타고난 멘털이 약한 탓에 치열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경쟁의 장에 뛰어들려 하면 겁부터 덥석 난다. 치열하게 살아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이의 성공담을 들으면 의욕이 생기기보다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 내가 브런치를 시작했다. 브런치라고 해서 진입 장벽이 낮은 것도 아닌데 쩐 일인지 브런치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잘 쓰는 작가님도 워낙 많고 자신만의 특색을 가지고 글을 쓰는 분도 많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다리를 뻗어볼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나 브런치를 시작했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특기할만한 변화를 이룰 것도 아니기에 가끔(아니 자주) 나의 약한 멘털을 붙잡고 다소 치사한 일을 벌이기도 한다. 가령 구독자 수가 높은 작가님을 발견하면 스크롤을 내려 글을 언제부터 쓰기 시작하셨는지 확인하고 위안을 삼거나 불안해하는 식이다.


작가님들의 브런치 시작일을 그렇게 염탐(?)하고 나면 괜히 쑥스러운 마음에 '숫자에 연연하지 말고 글이나 열심히 쓰자'는 다짐을 하고 실천에 옮긴다. 그러나 역시 일은 뜻대로만은 되지 않는 법이라 '구독/좋아요'알림을 꺼두는 일에는 성공했으면서 실시간으로 '통계'버튼을 누르는 일은 멈추지 못한다. 인터넷 팝업창의 안내문처럼 'o일 동안 보지 않기'설정이 있어서 반강제적으로 통계 버튼이 보이지 않게 하고 싶기도 하다. 특히 우연한 기회에 글이 다음 메인에 소개되어 조회수가 치달아 올랐다가 정상수치를 되찾은 오늘 같은 날에는 더욱 안보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특별할 것 없는 내 글이지만 다시 돌아온 일상은 낯설어서 생일파티가 끝나 친구들이 돌아간 후 멍하니 창 밖을 보던 어릴 적의 기분을 다시 느끼기도 한다.


때론 글을 쓰는 일 그 자체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문득문득 글감이 떠오를 때면 메모장에 적어두기도 하고 작가의 서랍에 넣어두기도 하는데 정리되지 않은 글감이 넘쳐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판단이 안 서는 경우가 많다. 요리 초보자가 좋다는 재료부터 다 사들이는 것과도 같은데 '그 좋은 재료들로 엉망인 요리를 내놓을까' 걱정도 된다. 초등학생 때 미술학원 선생님이 '훌륭한 화가는 이미 풀어놓은 물감을 조합해서 색을 만들어 쓰기 때문에 새로 물감을 풀 일이 적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싶다가도 여러 색이 흩뿌려진 팔레트가 내 서랍같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브런치를 계속 붙잡고 있는 이유는 글을 쓰면 쓸수록 내 안의 것들을 내놓고 그로 인해 힐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꺼내기 부끄러워도 꺼내서 글로 옮기고 나면 별 일 아닌 것 같아 그냥 넘기게 된다. 과거를 반추하며 당시에는 이해 못하던 일들을 이해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용서하게도 된다. 한 가지 에피소드를 꺼냈을 뿐인데 이후로 여러 상념들이 떠올라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사람인가'하고 놀라기도 한다. 어떤 종류의 글쓰기든 고도의 사고 과정을 필요로 하므로 글을 쓰고 나면 머리도 더 영민해지는 것 같다.


브런치 덕분에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영상 시청을 하는 등 여타 오락거리를 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게임이나 영상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브런치를 하고 있으면 '그래도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중이야' 하는 자기변호를 하게 된다. 진지함을 좀 얹어 말하자면, '언젠가는 하고 싶고 마지막까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했다는 데서 '그래도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마음을 편히 나누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상대와 길게 이야기를 하고 나서도, 내 속의 나와 긴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도 결론은 '언젠가는 글을 쓰고 싶다'였으므로.


그나마 다리를 뻗어볼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했고 그 기저에는 나름 진지한 고민이 있었다. 아주 긴박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글쓰기만은 멈추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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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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