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뻘건 식탁에 새하얀 점 하나
경상도 엄마를 둔 자식의 서울 급식 적응기
우리 집 식탁은 죄다 빨갛다. 가끔은 빨갛다 못해 시뻘겋다. 너무 많이 뻘건 날이면 엄마는 "경상도 사람은 빨개야 맛있다고 한다."는 말씀을 덧붙인다. 나는 음식 전문가가 아니라서 "모든 경상도가 다 그래."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부모님 고향인 상주 인근은 분명 그런 것 같다. 할머니 댁 식탁도, 친척들 식탁도 죄다 빨갛다.
음식은 원래 다 빨간 줄만 알았던 나는 이제 '하얀 맛'을 봐서 식탁을 좀 하얗게 바꿔보고 싶지만 역부족이다. 엄마는 일단 허여 멀-건하면 맛이 없다고 하신다. 애써 요리를 했는데 밥 먹는 내내 맛없단 소리를 듣기는 싫으니, 나도 빨갛게 요리를 한다. 시뻘겋게 안 하는 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그런 우리 집에도 하얀 음식이 있다. 무웃국이다. 경상도식 소고기 무웃국이랑은 또 다르다. 요즘은 많이 알려져서 아시는 분도 많겠지만 경상도 소고기 무웃국은 빨갛다. 나박나박 썬 무를 들기름에 볶다가 소고기를 넣고 같이 볶는다. 육수를 붓고 끓이다가 간을 하고 고춧가루를 풀고 썰어놓은 파까지 풍성하게 넣는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무웃국은 우선 무를 채 썰어서 끓인다. 소고기 무웃국과는 무를 써는 모양부터 다르다. 냄비를 달구고 들기름을 부은 다음 채 썬 무를 냄비에 넣고 볶는다. 허연 김이 나면서 타다다닥 무 볶이는 소리가 난다. 육수를 붓고 끓이다가 채 썬 두부를 넣는다. 간을 하고 파도 썰어 넣는다. 들기름에 무를 볶아놓으면 기름이 뽀얗게 우러나서 하얀 무는 더 하얘진다.
소고기 무웃국은 명절에나 해 먹는 음식이어서 나는 세상 무웃국은 다 우리 집 같은 줄 알았다. 뽀얗고 두부까지 들어간 국.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니 소고기 무웃국이라고 나왔는데 말간 국물에 무랑 소고기가 둥둥 떠있는 국이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 무웃국 범주에 속하던 국과 생판 다른 음식이었다. 국물이 하얄 것이면 무가 채 썰어져 있어야 하고, 무가 나박나박 썰려 있으면 국물이 빨개야 하는데 이도 저도 아니었다.
학교 친구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허여멀건한 소고기 무웃국을 조금만 받아서 몇 숟갈 떠먹고 버렸다. 애초에 급식이 맛있던 편도 아니었지만 무웃국만큼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소고기 냄새만 나고 맛이 없었다. 무웃국 얘기만 썼지만 간장에 조린 닭도 급식을 먹으며 처음 봤다. 흔한 건 아니지만 진미채를 간장을 넣고 허여멀건하게 무칠 수 있다는 점도 알았다.
자라는 동안 밖에서 허연 물을 들여서 왔다. 우리 집 식탁을 하얗게 바꾸고 싶다고 썼지만 어릴 적부터 먹어온 음식이 빨갰어서 선택을 하라면 빨간 음식을 먹겠다고 할 것 같다. 무웃국이라도 하야므로 빨간 것만 먹고 속에 탈이 날 확률이 줄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빨간 음식을 먹어서 탈이 난 적은 아직 없다.
엄마는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부지런히 거둬 먹이는 것으로 내 정서의 빈 부분을 메꿔주었다. 불러주는 일기도 똑바로 못쓴다며 꿀밤을 맞기 일쑤였지만 엄마가 김을 굽는 날이면 고 앞에 앉아서 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리는 과정을 지켜봤다. 김치를 하는 날엔 하도 집어 먹어서 매번 배탈이 났다.
그런 경험들이 있어서 이만큼 견뎠다.
*브런치에 첨부한 이미지는 소고기 뭇국이 아닙니다. 청국장 사진으로 대체.
늘 좋은 이미지를 제공하는 Pixabay운영진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