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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Jun 10. 2018

뜨거운 감자, 메이지의 선택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의 결말에 대하여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개봉한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의 결말에 대해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 등지에서 열띤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누군가는 그 상황에서 메이지와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라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래서는 안 됐다며 영화의 결말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영화와 그 내용에 대해 토론의 장이 형성되고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는 건, 감독과 관객 모두에게 굉장히 좋은 일이다. 감독은 이를 통해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를 파악하거나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으며, 관객들 역시 다양한 의견을 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보완하고 그 범위를 더욱 확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당연하지만 ‘다양한’ 의견의 제시가 필요하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여러 의견들이 서로 균형 있게 경쟁하는 과정 속에서, 관객들은 영화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므로 나도 그 다양성에 한 가지 추가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짧게나마 글을 적어보았다.


영화는 엔딩과 쿠키 영상을 통해 인간사회로 진입한 공룡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세계>에서 샌디에이고를 활보하던 티라노사우르스나 이번 영화의 모사사우르스를 생각하면 과연 메이지의 행동이 옳은 일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 글을 적고 있는 나도 클레어가 공룡들을 풀어주기 위한 버튼에 손을 올렸을 때는 적잖게 당황했고 그들이 일으킬 혼란과 피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클레어도 오웬도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시안화수소(독성 가스)가 공룡들에게 닥쳐오는 상황에서 '그들도 생명'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 그녀의 판단에 안심하면서도 마음에 무언가 탁 걸린 듯 답답함과 안쓰러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쥬라기 공원>을 처음 본 그 시절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던 공룡들이 살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진심으로 그들이 살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메이지가 버튼을 누른 것이었다.


샌디에이고를 바라보는 티라노사우르스(좌), 서퍼를 습격하는 모사사우르스(우)


영화가 앞서 말한 풀려난 공룡들에 의한 피해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웬은 클레어에게 경고했고 클레어도 끝내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클레어는 누르지 않았고, 메이지는 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두 인물의 차이로부터 기인한다. 두 사람 모두 공룡을 좋아하고, 또 공룡을 지키고자 한다. 하지만 둘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왜 영화는 메이지에게 ‘복제인간’이라는 특징을 부여했을까? 작중 이를 암시하는 부분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극의 절정 부분에서 이 사실이 밝혀지지만, 특별히 이야기의 흐름에 크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이러한 캐릭터성이 붙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과거와 비교해 더욱 발전된 유전공학과 이와 함께 비대해진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유전공학을 통해 DNA 조각으로 공룡을 부활시켰고 이제는 인간복제에까지 이르렀다. 존 해먼드에게는 ‘꿈’이었던 공룡들이 상업적, 군사적 이용가치에 따라 만들어지는 ‘자산’으로 여겨지듯이, 록우드의 죽은 딸을 살려내고 싶다는 마음에는 악의가 없었다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는 그들의 욕망과 이해관계에 따라 클론 기술을 악용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결말에서의 그녀의 역할이다. 그녀는 유전공학의 산물로서, 공룡들과 유사한 탄생 배경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그녀는 그 자리의 누구보다 더욱 공룡들에게 공감했고 괴로워하는 그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I had to. They’re alive, like me. - 메이지 록우드

영화는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메시지를 메이지라는 캐릭터의 특수성을 통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더해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블루와 오웬의 관계에 집중하고, 공룡들의 눈물이나 브라키오사우르스 장면 등을 통해 그들에게도 감정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쥬라기 공원>의 존 해먼드가 꿈꿨던 공룡이라는 신비, 그리고 <쥬라기 월드>에서 블루가 보여준 인간과 공룡 사이의 교감은 관객들에게 두 종족의 공존이라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를 바탕으로 영화의 결말을 바라본다면 메이지의 선택을 단순히 옳고 그름으로 단정 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말 그대로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영화는 영화라는 것이다. 관객들에게 정답을 던져주는 게 아니라 감독이라는 한 사람의 생각을 제시함으로써, 영화는 관객들 각자가 저마다의 해석을 이끌어내도록 하고 있다.



위 대사처럼 나는 인간과 공룡 모두가 길을 찾아낼 것이라 믿는다. 그 길은 공존일 수도 있고, 분리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한쪽의 멸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길이든 나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고, 지금처럼 나의 생각을 글로 남길 것이다. 어느 누군가가 자신의 견해에 따라 메이지를 질책하듯이, 나는 나대로 그녀의 선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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