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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Oct 01. 2023

신춘문예를 들추다

<펭귄 섬, 2023>

그때는 한창 직장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할 시기였는데 현실에 대한 자각이 부족했던 탓에 자꾸 딴짓에만 정신을 팔았다. 그렇게 나에 대한 무책임을 용인하며 열정을 쏟았던 일들 중 하나가 바로 시를 쓰는 것이었는데, 급기야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만나 시동인을 만들어 활동을 하기까지 했다. 신춘문예나 문학지를 통해 등단을 하는 이들도 나오곤 했으니 그래도 나름 열의를 가지고 임했던 문학에 대한 체면치레 정도는 한 셈이다. 각기 개성이 너무나 뚜렷하고 그만큼 다양한 색채를 띤 사람들이 모였다 하여 동인 이름을 '프리즘'이라고 지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작명을 한 것과 똑같은 이유로 하나둘 불협화음이 생기더니 결국 오래지 않아 모임 자체가 흐지부지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가끔씩 그 시절을 떠올리면 뭔가 극적인 순간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두어 달 전, 정말로 오랜만에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과거 몇 년 동안 수상 목록에 오른 작품들을 쭉 살펴보다가, 시가 아닌 수필이나 소설 쪽을 기웃거리는 나를 보면서 어느새 관심사도 좀 바뀌었구나 실감했다. 연도별, 신문사별 검색을 통해 한 편 한 편 훑어보는데 유독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어서 인쇄 버튼을 눌렀다. 대부분의 사무직 종사자들이 그렇듯 하루 중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단어와 문장의 뉘앙스라든지 전체적인 맥락을 살피며 읽어야 하는 글들은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한두 페이지도 아니고 여러 페이지를 읽어야 하는 거라면 더더욱. 사이버 세상에서 긴 글을 읽는 인내심을 발휘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202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작 <펭귄 섬>은 올해 읽었던 기억에 남는 작품들 중 하나다. 평소 독서에 할애하는 시간이 많지 않아 그만큼 접할 수 있는 글이란 게 한정적인데, 우연히 읽게 된 작품치고는 그 재미가 쏠쏠해 마치 어쩌다 얻어걸린 행운 같은 느낌도 든다. 내가 알고 있는 펭귄은 그리 많지 않다. 창사 50주년 기념으로 MBC 특집 다큐멘터리에 나왔던 펭귄,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인 뽀로로, 연령대를 불문하고 삽시간에 유명세를 탄 EBS 펭수, 그리고 유아기 조카를 돌보던 시절 비디오로 자주 만났던 핑구 정도. 그런 면에서 <펭귄 섬>이라는 제목은 나름 독특했다. 펭귄과 섬의 조합이라니. 펭귄 모양의 섬에 얽힌 이야기인가, 아니면 실제로 남극이 아닌 어느 섬에 살고 있는 펭귄 이야기인가. 어느 쪽이든 간에 선택과 집중을 요하는 네이밍 효과는 충분하다 싶었다.


제목에 대한 궁금증은 소설 초반에 아주 간단히 해소된다. 어느 방송국 예능 프로그램에서 '공섬에는 ○○이 있다'라는 퀴즈가 나왔고 '펭귄'이란 정답이 공개되자 그 이후로 엄청난 관광객들이 해당 섬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 그 펭귄이란 게 실제 살아있는 펭귄이 아닌 동네 어판장에 세워진 펭귄 모양의 동상을 일컫는 것이었다니, 기대했던 제목치고는 살짝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소설 중후반으로 넘어갈수록 하찮게 생각했던 그 펭귄이 아주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생물이 아닌 무생물 펭귄이 인구 삼천 명도 안 되었던 낙도에 어떤 풍파를 일으키는지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확인해 나가다 보면, 소설 초반 제목의 실상을 확인하고 시큰둥하게 반응했던 나와 같은 독자들은 살짝 겸연쩍어할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다. 나오는 사람들은 부모님, 외삼촌, 남동생, 그리고 섬사람들과 외지인 등등. 그들 중 유일하게 이름을 갖고 나오는 이는 화자의 남동생 화순이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를 '케도도'로 발음하는 탓에 친구들에게 놀림이나 받던 캐릭터였는데, 냉혹한 자본주의의 희생양으로 삶을 전전긍긍하는 외삼촌에게서 욕을 전수받은 후 자신감이 충만해져 결국은 또래 집단의 대장격 위치에까지 오른다. 혀 짧은 소리를 내는 탓으로 '씹새끼'를 '띱때끼'라 표현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나, 어떻게 보면 이것도 작가가 의도한 하나의 장치가 아니었겠나 싶다. 뭔가 불합리하고 희한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욕을 날리긴 하되, 너무 노골적이지는 않게 그러나 전하고 싶은 바는 분명히. 아무튼 그에게만 이름이 부여된 이유가 뭘까 궁금해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이 되었다.


펭귄 효과.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혹 이런 단어가 떠오를지 모른다. 평소에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펭귄 동상 하나가 방송에 소개된 이후 평화로웠던 낙도 공섬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자본에 이끌린 인간의 삶이 어떻게 해체되고 재편성되는지 확인하는 일은 자못 씁쓸하다. 하지만 그런 주된 줄기를 가지고 있는 소설이 기실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는 건, 등장인물들 간에 주고받는 대화나 각 상황에 대한 묘사와 서술 등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예사롭지 않은 솜씨 때문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대목에서 피식거리게 하거나 심각한 상황임에도 킥킥거릴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사회상을 웃음으로 한 꺼풀 벗겨 전하는 기술이 매력적인 소설. 이야기 끝에 공섬을 떠나는 게 아닌 공섬으로 돌아오는 외삼촌을 상상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던 화자처럼, 나 또한 언젠가 새로운 작품으로 돌아올 작가를 기대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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