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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Sep 30. 2023

내 몫의 선택

<피아니스트의 전설, 2002>

얼음장 같은 햇살이 아니어도 헐벗은 가로수의 앙상한 모습이 아니어도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계절이 겨울이라 느낄 때가 있다. 그렇게 착각하도록 만드는 순간이 있다. 어스름 충만한 새벽, 베란다 문을 열자 삽시간에 들어차던 한기. 계절을 앞서려는 듯 9월의 모퉁이에 불어온 찬바람이 어느 영화 속 뉴올리언스의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 상상으로 그려진 3월의 뉴올리언스. 지나버린 지 한참이고 다시 맞이하기에도 아직 요원하지만, 게다가 3월은 겨울이라기보다는 봄에 더 어울리는 시기라지만, 영화 속에 표현된 뉴올리언스의 3월은 어쩔 수 없는 겨울 끝자락의 모습이었다. 언뜻 보면 차갑고 냉정하며 무섭기까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풍경 속엔 아직 오지 않은 봄날의 햇살 아래 마지막 남은 한겨울 눈이 녹아내리는 속도로 가슴 충만해지는 따뜻함이 있었다.



In winter, it's beautiful. And in March, you can always count on one afternoon. When you least expect it, the fog slides in. A milky barrier hangs just below the street lamps. It cuts everything like a white blade. And it's magic. Houses lose their top floors, trees lose their branches, St. Louis Cathedral loses its spires, people passing by, they lose their heads. So from the neck up, everything disappears. All you can see in Jackson Square is a bunch of decapitated bodies, stumbling around, bumping into each other, saying "How's your mama and them?"



한 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 1월. 이제 막 항해를 마친 버지니아호 텅 빈 연회장의 피아노 위에 갓난아이가 버려져 있다. 대니 부드맨이라는 이름의 흑인 화부에게 발견되었을 당시 T.D. 레몬스라 적힌 상자 안에 놓여있었다는 이유로 졸지에 '대니 부드맨 T.D. 레몬 나인틴 헌드레드'라는 이름을 갖게 된 아이. 세월이 흘러 소년으로 자란 그는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면서부터 화부보다는 피아노맨으로 선상(船上)에서의 삶을 다져 나간다. 그렇게 배 밑바닥에서 일하던 소년 화부에서 홀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하기까지 서른 해가 가깝도록 단 한 번도 육지를 밟아본 적이 없는 나인틴 헌드레드.


대서양을 횡단하던 어느 겨울, 눈이 소복이 쌓인 버지니아호 갑판에서 동료 트럼펫 연주자 맥스는 이런 말을 건넨다. 요요처럼 유럽과 미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만 지낼 거냐고, 한평생을 이렇게 배 안에서 여행만 하면서 보낼 거냐고,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지 말고 단 한 번이라도 너 자신의 눈으로 직접 세상을 바라보라고, 게다가 너의 피아노 실력이면 많은 돈을 벌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나인틴 헌드레드와 맥스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은 개념 자체가 서로 달랐다는 것. 태어나 눈을 떠보니 배 안, 그래서 나인틴 헌드레드에게는 지금 딛고 서 있는 배가 바로 세상, 그러므로 그에겐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일이 자신의 삶 그 자체로 인식되는 것이지 결코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취하곤 하는 여행일 수가 없는 것.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소녀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항해가 끝나고 모든 승객들이 떠날 때마다 텅 빈 배에 혼자 남겨지는 외로움마저 기꺼이 감수해 왔던 그가 생전 처음 그 소녀를 따라 육지에 발을 내딛을 생각까지 품게 되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소녀는 몇 해 전 항해 중에 나인틴 헌드레드가 만났던 어느 북부 이탈리아인의 딸. 나인틴 헌드레드가 배에서 내리려고 했던 이유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당시에 소녀의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탓도 있었다. 육지에서 바라보는 바다, 그 엄청난 바다의 소리, 게다가 그것으로부터 각성하게 되었다 했던 삶의 새로운 의미. 한평생 배에서 살아왔지만, 혹은 한평생 배에서만 살아왔기에 결코 그 같은 바다의 생경한 외침을 경험한 적이 없었던 나인틴 헌드레드에게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이면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육지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과연 어떨까. 육지에서 바라보는 그동안의 내 인생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가방 하나의 인생. 서른이 넘도록 배에서만 살아왔던 한 남자가 마침내 육지에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이다. 트랩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걸음을 멈춘 그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육지의 풍경을 찬찬히 응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무엇을 느꼈음인지 몸을 돌려 다시 배에 오른다. 트랩을 다시 올라가기 전 바다로 날려버린 모자 속에는 아마도 육지에 대한 호기심이나 두려움, 혹은 일말의 미련 따위가 담겨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남은 인생에서 두 번 다시는 품지 않았을 것들. 여행을 즐기는 부호들, 꿈을 좇는 이주민들, 그 외 많은 이방인들을 태우고 다녔던 버지니아호는 전쟁이 터진 후 병원선(hospital ship)으로 활용되다가 시간이 흘러 제 운명이 다할 즈음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위에서 폭파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배를 떠나지 않았던 나인틴 헌드레드도 그 배와 운명을 같이 하면서 마침내 전설로 남게 된다.


그가 육지를 코앞에 두고 트랩의 중간에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지지 않고 영화의 후반부 등장인물들 간 대화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육지라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두려움.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이 시점에서 나는 언젠가 나인틴 헌드레드가 만났던 소녀의 아버지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보았던 바다, 두려울 만큼 거대했던 바다의 목소리에 주눅 들지 않고 그가 기꺼이 배에 올라탈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사랑스러운 어린 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사와 바람이 나 떠나버린 아내. 열병으로 숨을 다한 여러 자식들. 하여 마지막 남은 피붙이를 위해서는 기필코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야만 하는 절실함이 있었던 것. 일자리를 찾으려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가야 하는데, 결국 거기엔 바다를 피해 갈 수 있는 선택의 여지라는 게 아예 없었던 것.


그렇다면 나인틴 헌드레드는 어떤가. 과연 그에게는 바다를 떠나야 할 정도로 절실한 이유가 있었을까. 육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까. 이것저것 도무지 선택의 여지라는 게 없는 상황이었을까. 영화 속에서 그가 발걸음을 돌리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애초에 그 감정을 이겨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에 남아서도 남은 삶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인틴 헌드레드처럼 아직까지는 그래도 무언가를 선택할 여지가 남아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일까. 그것도 나름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늙어간다. 아니, 세상은 그대론데 내가 시들어간다. 골라 담을 수 있는 게 아직 남아있는 인생이라면, 그게 행복이라면 익숙한 것과 헤어져야 하는 차디찬 결심이 필요하겠다. 그렇게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하겠다.


https://youtu.be/gGZW4PDVmWo?si=o0HqKI4UHLQevT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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