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계절, 2023>
권여선이란 작가를 알게 된 건, 올해 여름 2008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 <사랑을 믿다>를 읽었을 때였다. 작품이 나오고 난 후 15년 정도 지나서야 처음으로 이름을 접하게 된 건데, 그도 그럴 것이 부정기적 독서를 일삼는 사람으로서 한때 장르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여러 문학작품들을 섭렵한 후 한동안은 이쪽 분야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15년이란 기간은 좀 심했나. 어쨌든 이 작품을 읽으며 문득 들었던 생각은, 사랑이란 걸 시작할 땐 아니 사귀기 시작할 땐 분명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이란 걸 인식시키는 과정이나 의식 같은 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오늘부터 우리 1일'이라고 상대에게 다짐을 받거나 서로의 동의를 얻는 일과 같은 것. 시간차를 두고 벌어진 남녀 간의 엇갈린 사랑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의 큰 줄기를 뽑아보니, '상대방도 내 마음과 같겠지.' 혹은 '설마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려고.'와 같은 미적지근하고 불확실한 심리가 시원의 뿌리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품의 실질적인 내용은 논외로 치고 어쨌든, 서로 간 썸띵 스페셜 단계에 접어들었다 치면 잊지 말고 선언해야 한다. '오늘부터 우리 1일!' 그래야 행여 뒤늦은 실연의 자각으로 앓는 일 따위 하지 않는다.
내가 직접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면 이제 연애 이야기는 사실 좀 식상하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풀어놓는 여러 에피소드들에 어떤 사연과 메시지가 담겨있는지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다. 예전에 <짝>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을 때만 해도 뭔가 주변인의 연애에 대한 일말의 호기심 같은 게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내 나름의 판단과 가치관을 들이대 타인의 연애를 재단하거나 감정이입하는 일에 시큰둥해져 버렸다. 피곤해졌다. 이런 것도 지금껏 살아온 세월의 힘 때문이라고 하면, 언젠가 내 몸을 스스로 가누지 못할 순간에 이르렀을 때 도대체 이 세월이란 건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축적해놓고 있을 것인가. 아무튼 연애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랬는지, 두 번째로 접한 그녀의 작품 <각각의 계절>은 전작보다는 조금 더 집중을 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 라고 표현하면 더 적절하려나. 아무래도 여기엔, 이 책에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들 중 맨 처음에 나오는 <사슴벌레식 문답>의 지분이 컸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된 한 시대의 아픔이 몸이 뒤집힌 사슴벌레의 버둥거림과 그 몸부림을 문답식으로 풀이한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 그리고 작중 화자인 '나'의 독백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나 작품을 읽고 나서 불현듯 들었던 생각 하나는, 내 몫의 감상을 떠나 과연 오늘날 젊은이들이 이 소설을 대했을 때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가질까 하는 것이었다. 책 속에 소개된 "북한강에서"라는 노래가 어떤 선율과 노랫말을 가지고 있는지, 등골 오싹하게 하는 국가보안법을 뚫고 비밀리에 평양축전에 참가한 이가 누구였는지, 갖은 고문으로 혹은 믿을 수 없는 배신으로 야기된 동지의 고통과 죽음을 어떤 식으로 소화해 낼 수 있는지. 끓어오르는 분노를 체념 속에 묻어버리도록 강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가치가 있는 것일까. 대학 초년 시절, 같이 하숙을 하면서 알게 된 4명의 친구들. 알듯 모를듯한 원인으로 자살에 이른 한 친구의 20주기를 맞이해 상기되는 시대적 비극. 읽는 도중에도 그렇고 다 읽고 나서도 안타까움이 쉬이 가시지 않는 작품이었다.
실버들 천만사, 하늘 높이 아름답게, 무구, 깜빡이,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기억의 왈츠. 네 번째 문단부터 무슨 내용을 쓸까 고민하다가 무작정 이 책에 실린 나머지 여섯 작품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써보았다. 엄마의 이혼으로 따로 떨어져 살던 모녀가 서로에게 '~씨'라는 호칭을 붙이며 대화를 이어가던 글이 있었지.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도 차마 직설적으로 꺼내기 힘들었던 얘기를 하기 위해 서로를 타자화 하는 장치를 동원했던 것일까. 그렇게 한 발 떨어져서 보아야 내면에 꾹꾹 눌러 담았던 진실을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걸까.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이는, 아니 펄럭여야만 했던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끝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무관심으로 사그라들고 말았던 한 사람. 하찮거나 평범하거나 고귀하거나 하는 것 사이엔 대체 뭐가 있는 것일까. 아, 순진무구에서 본 그 무구였구나. 이렇게 따로 떨어져 나오니 이게 무슨 말이지 싶었네. 그리고 깜빡이. 으음, 깜빡이라. 깜빡거리는 기억 탓이라고 하기엔 핑계가 너무 허섭한데, 조금 전 읽었던 글들에 대해 더는 뭔가 덧붙일 말도 고리 지어 이어 갈 맥락도 떠오르지 않는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즐거워서 재미있고, 슬퍼서 재미있고, 통쾌해서 재미있고, 찜찜해서 재미있고, 머리 아파 재미있고, 유별나서 재미있고, 담담해서 재미있고. 이렇듯 글을 읽었을 땐 어떤 식으로든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내 나름의 독서 지론인데, 솔직히 나머지 작품들에 대해서는 그 재미라는 걸 느끼기 힘들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메시지를 읽기 힘들거나, 메시지는 있으나 행선지가 묘연한 안갯속을 거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거나. 글을 읽다 보면 가끔씩, 이게 직업적 차원에서 글을 쓰거나 평가하는 사람을 위한 글인지 아니면 온전히 그 글을 향유하는 독자를 위한 글인지 판단하기 애매모호해지는 순간을 맞닥뜨린다. 책 말미에 붙어있는 한 평론가의 두툼한 해설은 마치 어느 파티 군중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따로 떨어져 있는 월플라워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왜 굳이 이런 해설까지 넣어가며 한 권의 책을 엮어야 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 이런 불만의 원인은, 너무 심혈을 기울여 읽은 내 탓은 아닌지, 처음으로 읽었던 사슴벌레식 문답에 너무 많은 몰입을 한 탓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과부하 걸린 마음으로 연이어 책장을 넘기는 게 무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과거 언젠가 문학을 멀리하기 시작했던 이유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소화해 낼 수 없는 내적 투덜거림을 발단으로 애써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들면서 그렇게 자연스레 소원해져 버렸다. 어떤 대상을 향한 바람이 도전이 될지 욕심이 될지 살아온 세월의 나이테가 증명해 줄 때가 있는데, 과거의 내가 그 도전을 스스로 꺾어버렸다면 지금의 나는 부려서는 안 되는 욕심을 붙들고 또다시 이 사달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막 알게 된 어느 작가의 작품들을 구실 삼아 애먼 화풀이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의 말미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오면 말 그대로 새로운 힘이 필요하다고.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든다고. 그렇다면 도전의 계절을 지나쳐 욕심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는 나는 과연 어떤 힘을 길러야 하는 걸까. 아니, 굳이 힘들이지 않고 아예 세상에 없는 계절로 살아 보는 건 어떨까. 그래서 다시 생각을 고쳐먹는다. 훗날 다시 한번 <각각의 계절>을 맞이하기로, 욕심을 내려놓고 그 계절을 읽어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