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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Nov 06. 2023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인생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중에 커피에 관한 글이 있다. <커피를 마시는 어떤 방법에 대하여>.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윈톤 켈리(1931-1971)의 피아노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 나름으로는 <Make The Man Love Me>와 비슷한 분위기의 곡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1959년에 발매된 앨범 <Autumn Leaves>에서 두 번째로 실려있는 곡이다. 오늘 아침 문득 하루키의 글과 윈톤 켈리의 음악이 생각났던 건, 어둠 속 출근길에서 만났던 비와 바람 때문이었다. 와이퍼를 켤지 말지 주저하게 만들던 비, 그리고 차창 밖 가로수 잎들을 흔들며 존재감을 과시하던 바람 때문에 내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항구를 낀 아담한 소도시, 바다 냄새를 풍기며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 어느 고적한 커피집. 출근 후 오랜만에 하루키의 글을 다시 찾아 읽다가, 바다를 향해 있는 어느 한적한 커피숍에서 통유리 창 너머로 빗소리를 동반한 흐린 풍경 속을 유영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주 잠깐 부렸던 사치인데, 바로 그 찰나의 순간 때문에 불현듯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도무지 해가 뜰 것 같지 않은 이 월요일을 보낼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사무실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았다.


https://youtu.be/bu5OPVNy8Qc?si=sP8voWuH1214KycA


오래전 내가 읽었던 몇몇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들 속에 양념처럼 여러 음악들을 첨가하곤 했는데, 이 글을 쓴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렇고 또 우리나라 작가들 중에는 윤대녕이 그랬다. 폭넓게 보자면 그 당시 두 사람의 작품 성향도 어느 면에서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예컨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더 나아가 미래의 세 부분으로 분열된 자아를 어둠이라는 물리적/심리적 공간 속에서 통합하고 화해시켜 가는 소설의 기술적 측면에 있어 나름 닮은 구석이 있다 여겼다. 중·단편, 그리고 장편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읽어온 윤대녕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이다. 작품의 질 때문이라기보다는 교내서점에서 책을 구입한 그날, 남들이야 옆에서 밥을 먹든 말든 학생식당에 죽치고 앉아 완독을 했던 탓이다. 하루 세끼 밥을 먹듯이 그렇게 책을 먹던 시절이 있었다.


나른한 오후에 커피가 생각날 때라든지 번잡한 세상을 잠재우려는 듯 분위기 좋은 비가 내릴 때면 간혹 하루키가 쓴 이 글을 찾곤 했었다. 글 자체로도 충분히 만족스럽지만 여기에 소개된 윈톤 켈리 때문에, 그리고 글의 말미에 언급된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 잔이 안겨다 주는 따스함의 문제'라는 글귀가 마음에 들어서. 약간의 욕심을 부려 제대로 음미하고픈 생각이 들었던 어느 날들엔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썼던 글 <Coffee>를 찾아 읽기도 했었다. 그런 와중에 내 인생의 어느 대목에서는, 열여섯의 한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해 가던 순간을 낭만적으로 회고하는 장면만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커피 한 잔의 맛과 향, 그리고 따스함의 문제에 대해 깊은 사고를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늘 아침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8시쯤 잠깐 사무실을 나서서 근처 커피집에 아아를 사러 갔다. 얼어 죽어도 아이스아메리카노, 얼죽아의 루틴으로 한 손엔 아아를 다른 한 손엔 우산을 들고 가벼운 산책을 하던 중 인적 드문 골목길을 지나쳐 가는 인상적인 차 한 대를 만났다. 와이퍼가 오가는 유리창을 제외하고는 사각의 몸체 빼곡히 울긋불긋한 낙엽들을 뒤집어쓴 승용차. 무슨 사연들을 저렇게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는 걸까. "좋았어, 찰칵!" 언젠가의 하루키처럼 나 또한 기록해 보고픈 순간이었거늘, 우산과 커피에 저당 잡힌 두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단편들을 모아 놓은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를 구입한 적이 있다. 목차에 나열된 여러 제목의 단편들에 대한 기대로 주문을 해놓고는,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커피>를 읽으려던 차 첫 문장에서 너무 실망을 했던 바람에 한동안 그 책 자체를 읽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내 나름대로 이 단편의 핵심은 바로 첫 문장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번역 자체를 너무 맛없게 해버렸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원문의 첫 구절은 이렇다. "Sometimes life is merely a matter of coffee and whatever intimacy a cup of coffee affords." 이 단편에 담긴 내용을 요약해서 압축해 놓은 표현인데 간결하면서도 꽤나 함축적인 여운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을 해당 책에서는 "때로 인생은 한 잔의 커피 같다."라고 번역해놓고 있었다.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글 말미에서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단편 <커피>에 나오는 바로 이 첫 문장을 커피를 다룬 글 중에서 가장 흡족하다고까지 했었다. "때로 인생은 한 잔의 커피 같다." 아무래도 하루키가 이런 느낌으로 그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https://allpoetry.com/poem/8508973-Coffee-by-Richard-Brautigan


그날 오후에는 윈톤 켈리의 피아노가 흘렀다. 웨이트리스가 하얀 커피잔을 내 앞에 놓았다. 그 두툼하고 묵직한 잔이 테이블 위에 놓일 때 카탕 하고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마치 수영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자그마한 돌멩이처럼, 그 여운은 내 귀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나는 열여섯 이었고, 밖은 비였다. 

그곳은 항구를 낀 아담한 소도시,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늘 바다 냄새가 풍겼다. 하루에 몇 번인가 유람선이 항구를 돌았고, 나는 수없이 그 배에 올라타 대형 여객선과 도크의 풍경을 질리지도 않고 바라보곤 했다. 설사 그것이 비 내리는 날이라 해도, 우리는 비에 흠뻑 젖어 가며 갑판 위에 서 있었다. 항구 근처에 카운터 외에는 테이블이 딱 하나밖에 없는 조촐한 커피집이 있어, 천장에 붙어있는 스피커에서는 재즈가 흘러나왔다. 눈을 감으면 깜깜한 방에 가두어진 어린아이 같은 기분이 찾아왔다. 거기엔 언제나 친숙한 커피잔의 온기가 있었고, 소녀들의 보드라운 향내가 있었다. 

내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커피맛 그것보다는 커피가 있는 풍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내 앞에는 저 사춘기 특유의 반짝반짝 빛나는 거울이 있고, 거기에 커피를 마시는 내 자신의 모습이 또렷하게 비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의 배후로는 네모낳게 도려내진 작은 풍경이 있었다.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의 선율처럼 따뜻했다. 내가 그 조그만 세계를 음미할 때 풍경은 나를 축복했다. 

그것은 또한 아담한 소도시에서 한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해 가기 위한 은밀한 기념사진이기도 하다. 자, 커피잔을 가볍게 오른손에 쥐고, 턱을 당기고, 자연스럽게 웃어요… 좋았어, 찰칵.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 잔이 안겨다 주는 따스함의 문제, 라고 리차드 브로티간의 작품 어딘가에 씌어 있다. 커피를 다룬 글 중에서, 나는 이 문장이 제일 흡족스럽다.

[커피를 마시는 어떤 방법에 대하여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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