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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Oct 28. 2023

아니야, 실은 나

https://youtu.be/kKhxpmkBthk?si=by5rjm7yrZPRxB


Radhika Miller의 연주를 듣는다.

둥그런 달이 뜬 이 가을밤에 참 잘 어울린다 싶은 <Spiritual>.

이 곡을 언제 처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 나는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시 한 편을 읽고 있었던 모양이다.

서두에 피아노 반주가 깔리고 이어 플루트 소리가 시작될 때 어김없이 떠오르는 그의 시,

<It's Raining In Love>.

사랑은 "비가 올 것 같아?"라는 실로 간단한 물음에조차 깃들기도 한다 했지.

한 친구의 말을 빌려 사랑보다는 친구로 남는 것이 스무 배쯤은 낫다고 했던 대목도 인상적이었고.

오늘처럼 유난히 베란다 창문으로 들어차는 달빛이 버겁게 느껴질 땐

하릴없이 나는 또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진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의 얘기를 풀어놓는 그를 만나 덤덤한 시간의 여정을 함께 하다 보면

지금껏 입 닫고 살아온 나 또한 결국 한바탕 수다를 떨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이 어둠이 걷힐 무렵 우리는

낯설지 않은 목소리로 서로에게 산뜻한 인사를 건넬 수도 있지 않을까.

"안녕."

비록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라 할지라도,

사랑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스무 배쯤 나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 서로에게 스며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족하지 싶다.


아니야, 실은 나

맑디 맑은 어느 가을밤 유난한 달빛 비치고

비가 내리는지 사랑이 내리는지 알 수 없어 마음만 젖어갈 때

방안 가득 널브러지는 습한 활자들을 주워 담아 누군가에게, 당신에게, 너에게

보내고 싶은 거지.

스무 배쯤 나은 친구를 핑계 삼아 한 번 더 너를

떠올려보고 싶은 거지.

가당치 않은 욕심을 이렇듯 능청스럽게 늘어놓아도 될 것 같은

10월 어느 날 밤에 말이야.


https://allpoetry.com/It's-Raining-In-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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