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뭇잎 Oct 21. 2023

글을 꼭 써야만 합니까?

아침 기온 11도, 진정 가을이 왔다. 9월이 되어도 여름인가 싶게 기온이 높아서 반소매를 입는 날도 많았는데.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저울질하지 않고 고민 없이 긴소매 옷을 입을 때이다. 세 남매 여름옷을 넣어야겠다 싶어서 서랍장을 여니 계절 구분 없이 옷이 섞여 있다. 이제 10살이 된 쌍둥이 남매가 추운 날 얇은 옷을, 더운 날 두꺼운 옷을 입고 나가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이렇게 엉망이면 손에 잡히는 대로 입고 갈 것이 분명하다. 13살 큰아들은 좀 나으려나. 종종 학교에서 계절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오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의 엄마는 왜 옷을 챙겨주지 않았을까? 엄마가 혹시 없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상하게도 아빠의 부재에 대해선 많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이 아빠는 옷도 안 챙기고 뭐 할까?’라는 생각이 떠오른 적은 별로 없으니까.


혹시 어느 날 내가 지구상에서 갑자기 사라져도, 우주의 먼지가 되어도,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아이들이 계절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싫다. 누가 나처럼 ‘쟤는 엄마가 없나 봐.’라는 생각을 하며 쳐다보는 것도 싫다. 우리 아빠의 죽음 이후에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떠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다가, 씻다가, 버스 타다가, 길을 걷다가 갑자기 떠나버리면 남은 이들은 어떻게 하나. 아이들만 있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나를 옷장 앞에 앉게 했다.


웬만하면 멀리 갈 일이 생겨도 남편한테 태워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아빠가 떠난 이후에 생긴 습관이다. 혹시라도 ‘우리 부부가 한꺼번에 다치기라도 하면 애들은 누가 보나’라는 생각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남은 자에 대한 걱정이 더 큰 까닭이다. 아직 죽음의 실체에 대해선 모르는 것이 많다. 그래도, 누군가는 떠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남는 이별이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만은 아니라는 걸 이제 안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안 좋은 일은 나를 비껴가리라는 착각은 하지 않는다.


두려움과 걱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울하고 가라앉은 감정은 상대방에게 금방 전해진다. 친구와 가족에게 나의 슬픔과 우울함을 이야기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았다. 감정을 뱉어낼 곳이 필요했고,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을 비워내는 일도 해야만 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쓰고 나니 정리되지 않은 공간의 작은 방 하나를 치운 느낌이었다. 다른 방, 또 다른 방 하나도 정리하고 싶었다. 방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는 불안을 청소기로 빨아들이고 싶었다. 주워도 주워도 떨어지는 머리카락처럼 아직 불안이 마음 구석에 진드기처럼 붙어있지만, 글쓰기의 힘으로 견디는 중이다. 역시 글쓰기의 힘은 세다. 분명, 불안이 있는데, 이게 힘에 부친다는 느낌은 아니다. 친구처럼 늘 함께 가는 존재처럼 느껴지다니.


내 안에 있는 슬픔도, 걱정도, 힘듦도 다 토해내고 나니 이제야 일상에 있는 소소함이 글감으로 떠오른다. 아직 내 글은 웃음 코드가 군데군데 숨어 있는 유쾌한 글은 아니다.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 책 제목을 보고 좌절한 적도 있었다. 내 글은 평생 잘 쓰는 글이 될 수 없겠구나 싶어서. 그래도 뭐, 글을 꾸준히 쓰다 보면 갱년기 우울증 정도는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가 나에게 “글을 꼭 써야만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작정이다. “여태껏 가성비 끝판왕이고 치유의 힘까지 있는 건 글쓰기밖에 없어서요.”

작가의 이전글 빛바랜 초록 아파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