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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Sep 04. 2023

빛바랜 초록 아파트

일단 집을 내놓았다. 아빠가 죽은 후 고인의 이름으로 된 것을 처리하는 일은 남은 자의 몫이었다. 아빠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엄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빠를수록 좋다고 판단했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부동산에서 연락이 드문드문 오긴 했지만, 실제로 거래가 성사되는 건 쉽지 않았다. 집을 팔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가위를 거꾸로 매달아 신발장에 넣으면 된다는 미신 흉내도 내었다. 사람 손 많이 탄 훔친 가위가 아니어서 그런지 효과가 없었다. 집 인테리어도 다시 하기로 했다. 이러면 좀 더 잘 팔릴까 하여. 집을 정리하기 위해 대구집에 들렀다. 빈집이라 아빠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가슴 저 밑바닥부터 울컥하는 무언가가 올라왔다. 아무도 없는 집이라 울기엔 참 괜찮았다. 누가 볼 것도 아니니까. 가전 도구가 다 빠져나간 휑한 집에는 내 소리만 울렸다. 결국, 아파트는 팔리지 않았고 세를 놓기로 했다.


태어날 때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살던 아파트 이름은 앞산 아파트였다. 앞산이라는 이름의 연유는 모르지만, 그냥 앞산 앞에 있어서 아파트 이름도 그리 지었겠지. 아파트 옆으로 하천이 흘렀다. 엄마는 빨간 다라 속의 빨래를 두드리고, 동생과 나는 걸리적거리는 티셔츠를 팬티 속에 넣고 첨벙첨벙 다녔다. 흐르는 물소리 사이에는 깔깔깔 거리는 동네 꼬마의 웃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아빠가 긴 출장을 갈 때면 엄마가 자주 아픈 동생을 업고 병원에 뛰어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옆집에 맡겨졌다. 옆집 영아 언니, 연아, 홍기랑 바람개비 돌리며 뛰어놀 수 있으니 아빠, 엄마가 없어도 무섭지 않았다. 빛바랜 초록색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아파트 1층에는 가끔 쥐도 들어왔다. 그것도 괜찮았다. 엄마가 기다란 검은색 연탄집게로 눌러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했기 때문에. 


유치원을 졸업함과 동시에  5층짜리 앞산 아파트를 떠났다. 12층으로 된, 엘리베이터도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와 고등학교 다시 6년 합쳐서 12년을 다른 동네에서 사는 동안 앞산 아파트가 뭐 그립거나 그렇진 않았다. 가끔, ‘도토리 주워다 엄마를 주면 도토리묵을 쑤어서 주었는데. 그게 참 맛있었는데.’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1998년, 스무 살이 된 해 재건축된 앞산 아파트로 다시 이사했다. 청록타운으로 이름이 달라졌다. 도로를 건너지 않고 앞산을 산책할 수 있다는 홍보를 하며 푸름과 초록을 강조했다. 아파트 옆 하천도 콘크리트로 메꿔지고 도로가 되었다. 달라지지 않은 점은 수십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CAMP WALKER. 벽돌 위의 똬리를 틀고 있는 철조망 역시 변하지 않았다. 수십 년째 군부대 이전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다시 이사 간 청록타운에서의 시간은 어릴 때와 같을 수 없었다.  사방을 둘러싼 책장. 조용하고 엄격한 분위기에 큰 숨을 내뱉기도 어려웠다. 내가 집에 머문 시간은 대학생 여름과 겨울 방학, 가끔 주말에 다녀간 날 합쳐서 1년에 4개월도 안 되었는데. 책장에 꽂힌 책을 보며 저런 책은 우리 아빠 말고 읽을 사람이 또 있을까. 저렇게 많은 책 중에 어쩜 재미있는 소설은 단 한 권도 없을까 하며 혀를 찼다. 엄마는 9층 우리 집에서 보이는 캠프 워커의 골프연습장을 보고 추석 명절 당일 기어코 한마디 했다. “저 사람들은 참 팔자도 좋지. 난 여기서 설거지하고 있는데, 명절에 여유 있네.” 변화에 민감했던 고등학생 동생은 키 178cm에 50kg 초반의 몸무게를 유지하며 잦은 두통과 복통을 호소했다. 할머니는 청록타운에서 치매 판정을 받고 엄마에게 자주 왜 밥을 안 주냐고 물었다. 고관절수술을 받고 요양병원에 가기 전까지 3년의 기억이 할머니에게 남아있을지 궁금했다.    

 

방 4개, 화장실 2개의 널찍한 공간을 다 활용하지 못하고 보냈다. 각자 방에 들어가서 방만큼의 공간만을 점유하며 나오지 않았다. ‘즐거운 나의 집’이 되기엔 상당히 부족했던 분위기를 탓하며 결국 난 자유를 찾아 독립했다. 아빠가 떠나고 나니 결국 나에게 제일 필요한 건 혼자 있는 자유가 아닌,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도 자유롭다 느낄 수 있는 꽉 찬 안정감이었음을 깨달았다.     


2023년 7월,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혼자 살던 세입자가 갑자기 고인이 되었으니 의논해야겠다는 연락이었다. 계약하는 날, 세련된 체크무늬 머플러 사이로 보았던 피곤한 기색의 그녀는 사실, 아픈 거였다. 나는 비록 넓으나 좁은 집에서 사는 듯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녀는 너른 공간을 충분히 누리며 여유 있게 살기를 빌었는데. 또, 집을 정리하며 쓸쓸한 빈방에 멍하니 앉아 보았다. 큰 창으로 보이는 앞산은 푸르기만 한데, 아파트는 다시 빛바랜 초록이 되어 집주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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