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어느 겨울, 엄마 아빠가 생겼다
1장. 나는 평생 어린아이 일 줄 알았어
"안녕하세요, 엄마 아빠."
낯설지만 그리웠던 말. 처음 엄마 아빠를 불러보던 일곱 살의 어느 겨울날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무서울 게 없던 20대 초중반. 나의 부모님은 지인의 소개로 한 다이어트 식품 사업을 시작했고, 그 인간에게 사기를 당해 취업도 전에 빚더미를 안은 신불자가 되어버렸다.
난생처음 돈의 무서움을 겪은 두 사람은, 그럼에도 서로를 지독히 사랑했던 두 남녀는 이 차가운 현실을 함께 등질 준비를 한다. 며칠 뒤 엄마의 임신 소식을 알기 전까지는.
처음 임신이라는 말을 들은 엄마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고 한다.
생명의 축복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그때의 상황과 나에 대한 미안함, 기쁨과 슬픔, 걱정과 기대, 당황과 혼란이 복합적으로 섞여 한꺼번에 몰려왔다나.
그러나 이제 막 아롱거리기 시작한 작은 불씨를 차마 꺼트릴 수 없었기에 두 분은 '어떻게든 한 번 살아가 보자!'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덕에 나는 태어나자마자 할머니 댁에 맡겨진 후 몇 년에 한 번 촌수도 모를 친척집을 전전했다.
나의 첫걸음마도, 첫 옹알이도, 내가 커가는 모든 흔적을 지켜봐 주는 이가 있었지만 그게 부모님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친척 어른들은 대부분 나를 좋아했다.
그중 8할은 나에 대한 동정심과 책임감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사실 별 상관없었다. 적어도 나를 귀찮은 짐으로 여기거나 하대하지는 않았으니까.
계절이 바뀌듯 나의 부모를 대신할 사람들이 몇 번이고 바뀌었다.
나에게는 익숙한 듯 낯선 행사였다.
그들을 부르는 호칭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지만 엄마 아빠는 여전히 부를 수 없는 그리운 단어였다.
그들은 나를 사랑해 주는 대신 물질로써 호의를 보였다.
언제나 나를 손님으로 여기며 부족함 없이 입히고, 먹이고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었다.
마치 때가 되면 화분에다 물을 주는 것처럼.
겨울이 오면 내 방에는 늘 따뜻한 전기장판이 켜져 있었다.
생일날에는 선물과 케이크로 축하를 받았고,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밥을 먹을 수 있었으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에는 새 옷이 생겼다.
하지만 그들이 채워주지 않는 마음의 빈자리는 추운 겨울날 반팔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보다 나를 더 춥고 외롭게 만들었다.
누군가가 보기엔 '배가 불렀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겪은 감정의 무게를, 그 외로움의 깊이를 감히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그들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 흔한 가족 행사, 재롱잔치 한 번 와 주지 않았다.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촌수도 모를 만큼 먼 친척인 나를 거둬주신 분들이기에 차마 투정 부릴 수 없었다.
물론 나를 키워주신 은혜는 잊지 않았고, 그들을 원망할 생각도 없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것에 만족하며 살겠는가.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나에게 호의를 베풀고, 다정한 말을 건네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이 집의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딱히 눈치를 주진 않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눈치를 보며 자랐다.
내가 의젓하고 사고도 안 친다며 좋아하시는 모습에 잘못을 하면 집에서 쫓겨날까 봐, 본 적도 없는 엄마 아빠가 나 때문에 나쁜 말을 듣게 될까 봐 무엇하나 조르거나 떼쓰지 않았다.
살아있는 인형이 된 것 같았다.
자본주의를 모르던 어린아이는 늘 사랑이 고팠다. 비싼 스테이크를 혼자 먹는 것보다 찬밥에 김치만 올려도 가족들과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자식까지 모두 어른이 된 집에서 가족 모두가 함께 모이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나는 넓은 식탁에 홀로 앉아 외로운 식사를 했다.
가정부 이모님은 그런 나를 안타깝게 생각하셨는지 내가 밥을 먹는 동안은 줄곧 내 옆을 지키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이모님마저 없었다면 내 건강검진 기록표에 위험 신호가 떴을 것이다.
내 외로움의 눈물이 찌개에 잔뜩 들어가서 식사시간마다 나트륨을 과다 섭취했을 테니까ㅎㅎ
가정부 이모님은 나만의 제일 친한 친구였다.
어느덧 나는 일곱 살이 되었고, 이 집을 마지막으로 7년 간의 이방인 생활은 끝을 맞았다.
이모님과 헤어진다는 사실에 눈물이 날 만큼 슬펐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내가 울면 이모님이 슬퍼하실 테니까.
그렇게 내가 태어난 곳, 대구로 다시 돌아왔다.
대구로 가는 차 안에서 친척 분은 나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를 만나니 신나지 않냐고.
그 물음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신난다'라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 아빠를 만난다는 게 신기했고, 나에게도 엄마 아빠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저 새로운 집으로 들어가고, 새로운 내 방의 새로운 천장을 보고, 새로운 어른들을 만나던 날들이랑 비슷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당연하면서도 낯설던, 그러나 싫지는 않은.
그렇게 대구 신천동의 한 커피숍에서 우리 가족은 처음 만났다.
2010년 2월, 겨울바람이 유난히 매섭던 날이었다.
ps. 엄마 아빠한테 처음 한다는 말이 "안녕하세요~" 라니 지금 생각하면 나도 웃겨 죽겠어! 그땐 정말 진지했었는데..
그때의 나 정말 예의 바른 어린이였네 굿~ ദ്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