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길었던 밤

1장. 나는 평생 어린아이 일 줄 알았어

by 베니

시간은 정말 심술쟁이 같다.

행복했던 시간은 한순간에 흘러가게 만들면서 왜 힘들고 지치는 순간들은 그리도 늦장을 부리는지.. 괘씸하기 짝이 없이 없다니까.


오늘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느린 하루였다.

분명 기운은 며칠 밤샘작업을 하는 것 마냥 쭉쭉 빠지는데 시계를 보면 아직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

오늘따라 수업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고, 창가 너머로 살랑거리는 나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던 중, 잊고 지냈던 어린 날의 악몽이 떠올랐다.


나의 부모님은 서로를 너무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과 결혼은 다른 문제였다.

각자 앞에 놓인 현실의 무게가 점점 버거워져서일까? 어느 날부터 평화롭던 집에는 듣기 힘든 소음이 득했다.


기울었던 가세가 조금씩 돌아온 후 나의 부모님은 함께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몇 년 뒤 엄마는 다른 사업에 도전했고, 두 사업이 모두 안정되었을 즈음 남들보다 조금은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때쯤부터 시작었다.

그들은 서로만큼이나 자신의 일을 사랑했다.

아빠는 조직의 발전과 성과를, 엄마는 공동체의 화합과 평화를 장 추구했다.


아빠는 사람들에게 너무 애쓰느라 성과가 느린 엄마를 답답해했고, 엄마는 결과만 보고 달리느라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아빠를 매정했다.

사랑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균열의 시작이었다.

서로를 이해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성과에 목말랐던 아빠는 단독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툭하면 야근과 출장의 연속이었다.

사업확장이란 이유로 몇 달씩 지방에 홀로 내려가기도 했다.


부간의 대화가 거의 없다시피 하면서부터

예전의 두 사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체 어른이란 뭐길래 순수한 사랑을 노래하던 두 남녀를 저렇게나 바꿔버린 걸까.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주워 먹어도 둘이라서 행복했던 그들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국 둘 사이의 희미했던 균열은 하나의 사건으로 해 돌이킬 수 없 파국을 맞이했다.

그때의 난 고작 열다섯 살이었기에 정확한 대화 내용이나 그들의 입장은 모른다.

누가 더 잘못했고, 누가 더 나빴고는 나에겐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나는 당사자가 아니었고, 그날의 일은 결국 일어났기 때문에.


하루 종일 폭풍우가 치던 씨처럼 집안에도 거센 폭풍이 불었다.

평소라면 베란다 밖으로 나가 엄마 아빠의 말소리를 애써 외면했겠지만 비바람 탓에 나갈 수 없었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방문을 굳게 잠그고 그저 1평 남짓한 이부자리에 엎드려 이불로 최대한 귀를 막는 것뿐이었다.


이 긴 싸움의 끝은 항상 똑같았다.

이성의 끈을 최대한 붙잡은 아빠가 현관문을 박차고 어디론가 나갔다가 다음 날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든 게 해결된 채 다시금 평화가 찾아와 있었다.


그래서 아빠가 빨리 나가기를 바랐다.

평소처럼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를 처음 듣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접시 따위를 '실수로' 떨어트려 깨트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고작 열다섯 살이었던 어린아이는 불안함을 외면한 채 방에 숨어 모른 척하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방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흐릿해진 기억이지만 그날의 풍경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네 살베기 동생이 할머니 댁에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조각, 피 묻은 손으로 이마를 움켜쥔 채 쓰러져있던 엄마, 비바람에 흔들리던 분홍빛 커튼,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아빠.


나의 아빠는 소름 끼치게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부부싸움에서도 먼저 언성을 높이는 건 엄마였고, 참다못한 아빠의 언성이 따라 올라가는 게 그들의 루틴이었다.

그런 아빠가 이성을 잃었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빠 나를 보더니 배기 손에 쥐었다.

내가 아플 때면 엄마 죽을 끓여주던 오래된 뚝배기였다.


바로 전까지 따스한 추억이 담겨있던 뚝배기가 내 머리를 가까스로 스쳐 지나가면서 멀리서 들리던 굉음이 귀 옆에서 울려 퍼졌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온몸이 떨리고 숨 쉬기가 힘들으며, 충격이 컸던 건지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애한테 미쳤냐며 소리 지르는 엄마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빠는 그런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 때문에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는 사과를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폭풍우 치던 그날 밤, 그 거실에 멈춰져 굳게 닫히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피구와 배드민턴을 하지 못했다.


그날 밤은 세상에서 가장 긴 밤이었다.

keyword
이전 03화특별한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