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아이
1장. 나는 평생 어린아이 일 줄 알았어
"우리 딸은 특별해"
어릴 적 엄마 아빠와 함께 살게 되면서 지겹도록 들은 말이다.
아무리 부모 눈에는 자기 자식이 뭐든 특별하고 잘나 보인다지만 나의 부모님은 그중에서도 특히 유별난 편이었다.
함께하지 못한 지난 7년 간 사랑을 모아뒀던 건지 얼굴 한 번 안 비추던, 전화 한 통 걸지 않던 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두 분은 나에게 사랑을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두 분 앞에 생긴 빚이 워낙 컸기 때문에 나를 데려왔을 때 까지도 빚을 다 갚지 못해서 친척 집에 얹혀살던 시절보다 상대적으로 빈곤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마트 떨이로 산 싸구려 반찬에, 나라에서 주는 쌀로 지은 밥을 함께 먹는 그 시간이 나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행복한 가족이었다.
평소처럼 저녁을 먹으며 말했다.
"나 친구들이랑 같이 피아노 학원 다니고 싶어."
그 말에 엄마는 웃으며 나에게 내일 학원 상담을 받아보자고 말했다.
짧은 시간 동안 엄마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스쳤겠지만 한창 꿈 많은 어린 새싹에게 차마 돈이라는 현실의 벽을 가르칠 수 없었던 엄마는 나를 위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나는 보이지 않는 어른들의 현실을 모른 채 친구들과 함께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그 피아노가 부모님의 빚을 더 늘리고 있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진작 그만뒀을 텐데.
나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즐거웠고, 즐거워서 열심히 했다.
배우는 곡을 연습하기 지겨워지면 연습 횟수만큼 칠하는 포도알을 한 번에 3개씩 칠하고 친구와 '젓가락 행진곡'이나 '고양이 춤'을 함께 치며 누가 더 빨리 치는가를 대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배우던 곡을 더 완벽하게 연주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서 금세 다시 연습실로 돌아가곤 해 원장 선생님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내겐 피아노 재능이 조금은 있었기에 나는 꽤 오랫동안 학원을 다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꿈이 생겼다.
한 번 시작하면 집안 기둥을 다 뽑아먹고, 돈을 티슈처럼 뽑아 써야 한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입시반 수업은 취미 수업과 비교도 안 되는 돈이 들었다.
그때쯤 나는 이미 현실을 깨달은 뒤였다.
처음으로 돈 없는 현실이 서러웠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는 내가 조금이라도 더 현실을 모르고 순진하게 자라길 바랐다.
젊음과 청춘을 갖다 바친 보상으로 자식이 하고 싶다는 건 뭐든 해주고 싶었다나.
내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아빠는 그간 가슴속에 억눌러왔던 자신의 오랜 꿈이 다시금 싹을 틔운 기분이었다고 한다.
아빠의 어릴 적 꿈은 가수이자 연주가였다.
하지만 보수적인 시대 분위기와 집안의 장남이라는 이유로 아빠는 그토록 원하던 음악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아빠는 어른이 되면 반드시 기타 하나를 등에 메고 전국을 누비며 자유로운 예술가처럼 살겠노라 마음을 먹었지만 애석하게도 돈의 노예가 된 그가 기타를 다시 잡았을 때는 이미 현실에 치여 회색도시의 일원이 된 후였다.
그곳의 어른들은 먹고살기 위해,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노예처럼 일해야만 했다.
꿈과 마음을 잃어버린 회색도시의 사람들처럼 아빠의 마음도 어느새 회색빛으로 물들어 버렸다.
그래서 자식인 내가 아빠의 잊힌 꿈을 이뤄주기를 바랐던 걸까.
아빠는 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남들이 하는 건 나도 다 할 수 있다고, 심지어 나는 더 잘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아빠의 꿈을 대신 이뤄준다면 아빠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그 말, 그 기대가 하루하루 내 숨통을 조여왔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날 지금처럼 사랑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기대에 대한 부담감보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더 컸기에 나는 어떻게든 아빠를 만족시켜야 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기대에 부응해야 하니까.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의 기대와는 달리 입시반 수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내 실력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 다른 친구들보다 피아노를 잘 쳤다.
하지만 잘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더 잘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게는 분명 재능이 있었지만 애매한 재능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피아노 치는 게 즐거워서 입시반 수업을 듣기 시작했지만 교수님의 혹독한 훈련과 레슨은 나를 몇 번이고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내 앞에는 언제나 비교대상이 있었고, 음정을 틀릴 때마다 내 일주일 간의 노력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헛짓거리' 취급을 받았다.
레슨날만 되면 학원에 가기 싫었다.
빽빽이 그려진 음표들을 보는 게 무서웠고, 건반에 손을 올려야 하는 그 순간이 죽을 만큼 괴로웠다.
피아노를 치는 게 더 이상 즐겁지 않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도전하는 것도 용기지만, 포기하는 건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아빠를 실망시킬까 겁이 났다.
하지만 언젠가는 부딪쳐야만 했다.
나는 아빠만을 위한 인형이 아니니까.
그걸 조금만 더 빨리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ps. 특별한 사람이 되는 건 여전히 쉽지 않아.
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언제든지 될 수 있지(~ ̆▾ ̆)~
오늘도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야겠어!
오늘 내 행복은 아이스크림이 가져다줄 거야 ꔣ₊˚.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