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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니 May 18. 2024

아빠의 인형

1장. 나는 평생 어린아이 일 줄 알았어

 어느 나른한 휴일 오후.

오랜만에 티비를 보고 싶티빙에서 여러 선택창을 들락거리다 예전에 즐겨 보던 추리 만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 만화는 내 아픈 손가락이었다.

작품 자체로는 스토리며 연출이며 뭐 하나 빠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지만 작화에 대한 호불호가 굉장히 큰 편이었다.


 특히 한창 마법소녀물과 같이 얇은 선화에 밝고 알록달록한 색상을 사용한 여러 애니메이션들 속에서

비교적 굵고 단순한 선화에 우중충한 색감을 가진 이 만화는 탄탄한 스토리에 비해 시청률이 저조했다.


 하지만 나 같은 마니아층 사이에서는 그런 것들조차 매력이었다.

그걸 시작으로 나는 조금 이른 나이에 온갖 추리만화들을 도장 깨기 하듯 찾아봤더랬다.

부모님 몰래 밤늦게 방영하는 추리 만화를 보려다 들켜 혼나기도 했지만 추리 만화가 너무 좋아 이것저것 많이도 봤었다.


 그중 유독 기억에 남는 회차를 꼽자면 '마술열차 살인사건'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작중 유명한 빌런인 '지옥의 인형술사'의 첫 등장 회차 이기도 한 이 시리즈는 탐욕에 눈이 먼 어느 마술단 단원들이 본인들의 스승인 단장 마술사를 살해하고 그녀의 마술 트릭 노트를 훔쳐간 일에 대한 복수가 살해 동기였다.

 

 작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마술은 '살아있는 마리오네트'라는 마술이었는데 거대한 꼭두각시 인형이 스스로 줄을 끊고 줄넘기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등 기상천외한 마술이었다.


 슬픈 말이지만 그 모습은 마치 과거 누군가의 마리오네트였던 어린 날의 소녀를 연상케 했다.


 사랑하는 나의 아빠는 나에게 자유와 책임을 늘 가르쳤다.

공부를 강요하진 않겠지만 내가 하겠다 말한 것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며 늘 신중하게 선택하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늘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고, 그들보다 더 크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님에도.

다정했던 아빠의 그 말이 나를 얼마나 숨 막히게 했던가.


 아빠의 자유는 언제나 상대적이었다.

내가 피아노를 선택했기 때문에.

내가 그의 꿈을 대신 이루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피아노와 관련해서는 한숨의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 당시 내 세상엔 피아노가 전부였기에 아빠가 주는 그 자유는 그저 과거 본인이 자식에게 저지른 실수를 속죄하는 무의미한 배려일 뿐이었다.

정작 나는 그 배려 때문에 더 괴로웠는데.


나는 분명 피아노를 치는 것이 즐거워서 시작한 것이었는데 어쩌다 피아노 의자에 앉는 것조차 싫어진 걸까.

 잘하는 애들 사이에서 더 잘할 수 없는 애매한 재능, 그리고 그 애매함을 점수로 평가받는 순간.

그 순간이 나를 얼마나 더 절망으로 끌어당겼던가.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학원에 가서 매일 똑같은 자리에 앉아 매일 똑같은 악보를 보며 매일 똑같은 선율을 수 백번 수 천 번 되풀이하는 것뿐이었다.


 '지금까지 나한테 이만큼이나 투자했는데 실망시켜 드릴 순 없어.'

이러한 이유로 나는 기나긴 날들을 버텨왔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뒀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빠가 또 그때처럼 날 위협할지도 몰라.'

'또 그때 같은 일을 겪기 싫어.'

'내가 잘하면 아빠는 화내지 않을 거야.'


 이런 이유로 나는 그의 인형이 되기로 했다.

그의 손을 통해서만, 그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슬픈 꼭두각시 인형이.


ps. 나는 버티는 것도 용기지만, 그만두는 것 또한 용기라고 생각해!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매일 희망찬 하루를 살고, 앞으로 나아갈 수만은 없잖아? 매일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며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도, 많은 고민 끝에 불안함을 안은 채로 떠나는 사람들도 모두들 정말 용감했다고 말해주고 싶어. 오늘 너의 선택이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오늘도 용감한 선택을 한 넌 정말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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