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 노동자의 최고봉 어머님이 육아 판을 뒤집어 놓으셨다.
대결 시어머님 vs 며느리: 육아 편
- 육아 편: 돌봄 노동자의 최고봉 어머님이 육아 판을 뒤집어 놓으셨다.
세상 꼼꼼한 남편과 살면서도 어영부영 대충대충 살아가는 아내와 좌충우돌 부딪히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아아, 그를 낳고 기르신 그러니까 그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신 어르신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좌충우돌 부딪히는 것은커녕 납작 엎드려 연신 죄송하다고 외쳐야 할 상황이 많았거늘. 허나 시어머니와 나의 사이는 그런 편안한 관계가 아니었다. 한쪽에서 대 놓고 화를 내는 관계도 한쪽에서 납작 엎드려 절을 하는 관계도 아닌, 세대가 조금 다른 동거인과 동거인의 그 어정쩡한 사이.
어영부영 대충 대충으로 표현한 나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뭐든 꼼꼼하고 디테일한 마무리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편이다. 청소 편에서 언급했듯이 위생 상태는 신경 쓰지만 정리 면에서는 결코 신경 쓰지 않는, 그러니까 겉모습만 보면 누군가는 호쾌하고 털털하다 하겠지만 그 속의 뜻은 매우 지저분하고 단정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내 몸은 고사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돌보는 데에서도 아주 자주 나타난다. 나는 때로는 이러한 면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 최고 긍정주의자(아니, 회피 주의자일까?)이다. 이 시대의 긍정왕, 긍정 엄마 그게 바로 나야 나! 김경림 작가의 ‘나는 뻔뻔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에서 주변의 워킹맘들에게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 많은 워킹맘이 본인은 ‘100점 만점 중 60점짜리 엄마’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스스로 질문한 나는 “나 정도면 80점짜리 엄마 아닌가?” 하며 자신만만해했다. 실상은 80점은커녕 50점도 안 될 수 있을지 모르는 불량 엄마지만 내 마음만은 80점이었다(양심상 100점은 못주겠다라). 80점이란 증거가 있냐고? 물론 있다. 아이들에게 음료를 쥐여 주거나 과일을 먹일 때, 핑거푸드가 메인 요리일 때 나는 두 쪼꼬미 들이 그것들을 뒤엎고 내팽개치고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옷에 물들면? 빨면 되지~ 빨아도 안 지워지면? 대충 입히다 버리면 되지~ 색연필을 쥐어 줄 때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스케치북에 낙서하라고 쥐여준 색연필이지만 어느샌가 우리 집의 하얀 벽은 내 팔보다 긴 상어 가족의 수족관으로 탄생 되었다. 거기서도 난 화내지 않는다. 대충 살다 이사 가면 되지 뭐~ 하여튼, 뭐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 내복도 단추가 풀려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다행히 외출복은 그렇게 입히지 않는다), 잘 때 더우면 알아서 이불을 끌어 덮으라고 굳이 신경 써서 밤새 보초를 서지도 않는다.
이런 나와 다른 시어머님은 한 번도 말을 꺼내신 적은 없지만 속으로 얼마나 잔소리하고 싶으셨을까 싶다. 새벽에 화장실을 다녀오시다가도 혹시라도 나와 함께 자는 아이들이 배가 차가울까 봐 이불을 정비하고 나가시고, 내복 단추는 항상 철저히 잠가 주시며 딸아이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땋아 주신다. 매일 매일 날씨를 체크하고 기온 변화가 심할 땐 아이들에게,
‘선생님께 에어컨 틀면 이 옷 입혀달라고 전해~’라고 당부하시기도 한다. 그러니까 어머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와 다르게 100점 할머니이다. 절대 점수가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엄마와 할머니라는 상대적인 위치 때문이다. 엄마는 조금만 못해도 -, 할머니는 조금만 잘해도 +.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관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적인 점수로 굳이 비교하자면 나 스스로 생각하는 80점과 어머님의 100점이 같다고 봐야 공평하지 않을까? (응 아니야, 위에 네가 쓴 글 다시 봐)
어머님이 훌륭한 돌봄 노동자인 점은 나에게 좋은, 혹은 어려운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다. 먼저, 어머님을 무한 신뢰할 수 있다. 어쩌다 잡히는 장기 출장에도 어머님만 계시면 든든하다. 애들 아빠보다 든든하다. 어머님은 남편 심지어 내가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까지 챙기시니까. 아이들이 먹는 음식, 환경, 심지어 하실 수 있는 한에서 책을 읽어 주시거나 장난감 정리를 가르치는 인성교육까지도 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나는 어머님이 우리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육아 도우미를 하신다면 누구보다 훌륭한 S급 돌봄 노동자가 될 것이라 장담한다. 그러나 이런 점은 묘하게 나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평생 일을 해 오신 어머님은 두 아들을 키우시며 지금 그 아들의 아이들까지도 저렇게 세심하게 봐주시는데, 그보다 편한 환경에 있는 나는 어머님보다 못한 돌봄 노동자다. 그러니까 어머님의 완벽한 돌봄은 내가 할 수 없는 빈 곳을 채워주면서 동시에 그 공간을 넓게 만드는 모순적인 역할을 해야 한달까?
어머님 세대, 그러니까 내 엄마의 세대의 대부분의 여성은 가부장제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숨 쉬듯 수행해왔다. 가정일을 돌보는 것부터 육아와 필요시에는 직업을 갖거나 직장을 다니며 사회 곳곳의 노동자로서 해야 할 역할도 충실히 이행했다. 사회가 바뀌고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다 한들, 이런 엄마의 역할을 내면화 한 우리 세대의 여성 중 ‘슈퍼 우먼 콤플렉스’가 없는 여성이 있을까? 잘해야 했고, 심지어 잘했던 과거의 선배들을 보면서 어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겪는 죄스러운 마음은 모른 척하고 싶지만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지진 않는다. 이런 콤플렉스가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왜 100점짜리 엄마가 될 수 없는지, 나는 왜 아이들에게 섬세하게 할 수 있는 여력이 없는지. 옆집 아들 친구의 엄마가 아니라 내 가족인 시어머니의 세심함에서조차 나는 자신을 스스로 비교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나는 엄마의 역할을 더 잘하고 싶기만 하고 싶지 않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함께 자라는 내 아이들이 ‘엄마라면’이라는 고정관념을 되새기며 내면화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아이들이 보는 엄마의 역할은 꼭 사회에서 말하는 ‘모범적인’ 엄마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좀 풀어져도, 좀 이기적이어도, 좀 이상해 보여도 자식들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은 같지 않을까? 참으로 변명하는 말 같기도 하고, 참으로 비겁한 이유이지만 나는 김경림 작가처럼 뻔뻔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 동시에 뻔뻔한 며느리가 되기로 했다. 아직 육아 문제로 훈계하지 않는 어머님의 마음에 감사하며 동시에 앞으로도 어머님이 가지신 타고난 달란트는 잘 발휘하길 바라며. 동시에 그런 어머님께 언제든 내가 빵 터지기만 하면 넉넉한 용돈을 S급 돌봄 노동자만큼 드리겠다고 약속하며, 이런 며느리의 마음도 이해해 주시길 바라며.
이 글도 어머님이 아이들을 살뜰하게 돌봐주시는 틈을 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