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이 행동하거나 갑자기 분위기를 깨는 사람을 보면 생각합니다. ‘무슨 사연이 있나보네.’ 정말이지 그 사람은 괜한 심술을 부리는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태국에서 코끼리 쇼를 보던 저도 그랬거든요.
코끼리들의 묘기와 행진을 볼 때만 해도 저는 박수치고 환호하는 관람객이었습니다. 피날레 댄스 타임이 시작되면서 분위기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거지요.
“Born to be alive! It’s good to be alive! To be alive!”
돌연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롤러장 팝송 메들리가 향수를 자극해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Born to be alive! It’s good to be alive! To be alive!” 노래를 기억하는 입술은 흥얼대기 바쁜데 눈물샘은 흘러넘치기 바빴습니다. 코끼리 단원들의 군무로 일어난 흙먼지가 들어간 척 닦아내긴 어림도 없는 방류량이 볼을 지나 목에 두른 스카프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냥, 울었습니다. 눈치고 체면이고 부질없는 상황. 흘깃흘깃 관람객들의 시선과 일행의 놀란 표정을 무릅쓰고 크르릉 코를 풀며 오열하는 신스틸러가 되고 말았습니다. 미움받을 용기만큼 갖추기 힘든 게 눈물 보일 용기구나 싶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코끼리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너희는 왜 도망을 가지 않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6톤이 넘는 덩치로 맞기만 할 거야? 기운이 모자라니 친구가 없니. 반항이든 탈출이든 뭐라도 해서 코끼리답게 살란 말이야!’
조련사가 정수리를 찔러도 재롱을 부리고, 매질이 거셀수록 더 신나게 리듬을 타는 코끼리. 닦달인지 애원인지 모를 말투였지만 혼신을 다해 텔레파시를 보냈습니다.
“왜 도망가질 않았어? 그렇게 맞고만 있으면 어떡하니? 어디 숨든가 피하기라도 해야지.”
등교하기 전 깜박하고 가리지 못한 피멍을 볼 때마다 선생님은 같은 질문을 반복했습니다. 더없이 참담한 안색이었지만 저는 답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궁금한 쪽은 저였습니다.
‘어디로 도망을 가면 다시는 안 맞아요? 선생님 집에 가도 돼요? 도와줄 것도 아니면 왜 자꾸 물어보세요? 대들었다간 저만 더 맞는다고요….’
당장 어떻게 해줄 것도 아니면서 도망가지 않는 코끼리를 나무라다니. 댄스플로어로 날아온 제 텔레파시를 받은 코끼리들도 선생님을 책망하던 제 심정을 알 것만 같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발이 묶인 채 자라나 발목에 끈 한 줄만 둘러놔도 탈출은커녕 시도조차 하지 않는 코끼리는 학습된 무기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자유의 몸이지만 누운 자리와 혼연일체가 되어 무기력하게 보낸 시기가 제게도 있었습니다.
세수마저 대단한 인물의 업적인 양 시작할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외항사에 합격한 뒤 홍콩에서 교육을 완수하고 셀레임에 비행을 시작했건만 느닷없이 추락해 바닥을 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외국생활에 적응하며 비행을 병행하는 스트레스에 쓰나미처럼 덮친 우울과 불면으로 망연자실 여러 날을 보냈습니다.
무기력과 씨름하다 사나흘이 후딱 지날 때가 많았습니다. 의지력 부족에 게으름까지 추가된 걸로 오해받기 딱 좋은 겉모습과 반대로 제 머릿속은 춘추전국시대 못지않은 혼란이었습니다. 나약해 빠진 자신에 대한 분노와 자책. 새롭게 정신 무장할 결심과 재빠른 포기가 돌풍처럼 일었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패턴의 연속이었습니다.
국경을 넘어왔는데 고생의 끝이 아니었다니. 충격이었습니다. 다시 추슬러 날아본들 여지없이 곤두박질칠 거란 엉뚱한 확신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제 망할 기운도 없어. 지금보다 더 큰 화를 부르지나 말고 쉬는 김에 더 쉬자고. 병가를 더 쓰면 되잖아.’ 그렇게 자포자기겸 거짓 위로에 빠져들다 별안간 정신을 다잡았습니다. ‘누워 있으려고 외국까지 왔냐? 무조건 죽으란 법은 없는 거야. 마침내 자유의 품에 안겼다는 걸 기억해! 그러니 당장 일어나자!’
불꽃처럼 타오른 패기는 불꽃처럼 사그라들었습니다. 타로카드의 기사들처럼 의기충천하라고 몰아칠수록 몸과 마음이 석고상처럼 굳어버렸습니다. 자신이 요구하는 무리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처럼 시작도 전에 진빠지는 일도 드물었습니다.
‘죽기 살기로 올인해서 보란듯이 결과물을 만들어내라고! 알파걸, 수퍼우먼, 젯셋족, 골드미스, 최연소 CEO. 안 보여? 다들 잘만 해내고 있다고. 척척 헤쳐나가고 있다니까. 너. 너만 빼고 다 잘 나가고 있단 말이야!’
‘내 주제에 침대도 과분하다.’
KO패자로 바닥을 링 삼아 뻗어 있던 어느날. 첫 LA 비행에서 구입한 배트맨 날개 모양 벽시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신경끄기 기술을 마스터했는지 주인이 무기력 하든 말든 척척 갈 길 가는 초침을 시선으로 따라갔습니다.
전생에 롤링핀이었나. 이리저리 연일 구르다 시계가 멈춘 걸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직립보행 모드로 건전지를 사러 간 일이 떠올랐습니다.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살고는 있어도 막상 시간이 멈춘 시계는 보고 싶지 않았나봅니다. 명이 다한 전임자 탓에 끌려와 배트맨 날갯죽지에 갇힌 새 건전지가 틱틱틱 시간을 움직이는 소리가 가슴에 울렸습니다.
‘나야 뒹굴거릴 공간은 충분하다만 넌 관 속에 누운 거나 다름이 없구나. 갇힌 신세가 분하고 억울해서 터져버리든가 아니면 누액을 철철 흘리며 통곡하다 방전되는 길도 있는데, 갇혀서도 할 일을 하고 있구나. 자가방전의 웅덩이에 널부러져 부식되는 건 네가 아니라 만물의 영장인 나로구나….’
아프리카 대평원에서 귀를 펄럭이며 질주하는 코끼리의 위용은 아니라도 밧줄 끊고 달리는 코끼리를 그려보았습니다. 코끼리는 밧줄을 휘날리는 순간 자유를 만납니다. 세계를 누비는 대활약은 아니라도 자기 페이스대로 나아가는 초침의 한걸음을 떠올렸습니다. 지금 손에 쥔 자유 한 줌으로 가능한 일이 무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푸아푸아. 세수라는 대단한 인물의 업적에 도전장을 던지고 일어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