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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Mar 20. 2017

달라스에서 만난 윈스턴 처칠경의 초상화

다섯 해 전엔 다섯 시간 운전이 소요되던 달라스까지의 거리가 세 시간 반 거리로 가까워진 것은 휴스턴에서 외곽으로 나가기 위한 순환도로가 하나 더 늘었기 때문이다. 점점 더 가까워지고 점점 더 편리해지는 세상. 텍사스를 남북으로 잇는 45번 고속도로변에는 노란빛과 보랏빛 들꽃이 만개해 있었고, 새벽안개를 헤치고 나온 부지런한 사슴들은 들꽃으로 이른 아침 식사를 하는 풍경도 보였다. 꽃과 아침 이슬을 먹고살아 꽃사슴인가.... 시속 70마일로 달리는 차 속에서 그 시적인 광경을 사진에 담기란 너무나 찰나의 순간이었다. 예상 못한 장면이라 더욱 그랬다.


들판을 뚫고 난 도속도로를 몇 시간 달리다 보면 도로는 어느덧 도심을 휘감아 도는 고가도로로 입장하고 마천루가 시야 가득 들어온다.  도심의 랜드마크 중 하나는 IM PEI 가 설계한 크리스털 결정의 모양을 한 건물이다. 아이엠 페이는 중국계 건축가로, 세계 곳곳에 자신의 건축물들을 심어 놓았는데, 개성이 너무나 독특하여 건물을 한번 보면 잊지 못하고, 건축가인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면 세상 어느 도시엘 가더라도 그의 건축물은 한눈에 들어오게 되는 식별력이 자연스레 길러진다. 개인적으로는 사진을 무척 잘 받는 건물들이며, 맨눈으로 보아선 선뜻 친해지기 힘든 디자인과 설계라는 생각이다.

 


달라스 시청사 역시 아이엠 페이의 설계인데 달라스 시민들 역시 이 건물에 유감이 많은 모양이다. 옵서버라는 제목의 지역 신문은 달라스에서 가장 못생긴 빌딩들을 리뷰하는 기획 기사를 실은 적이 있었는데, 시청 건물을 꼭 리뷰하라는 청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정작 기사를 쓴 사람은 달라스 시민들이 그 건물을 왜 그리 미워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색을 입히지 않은 콘크리트와 유리를 주재료로 피라미드를 엎어 놓은 그 건물은 밖에서 볼 때도 당황스러웠지만, 실내로 들어가 2층 3층을 걸을 때는 어지러움을 느껴 벽을 붙잡고 걸어야 했다. 건축엔 문외한이지만, 달라스 시청을 생각하면 심리학적으로 아이엠 페이라는 건축가가 사디스트적인 기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의심이 종종들곤 한다.   



 


        또한 홍콩을 다녀온 분들이라면 아마도 누구나 기억할, 빌딩 전면에 엑스자를 두른 차이나 뱅크 본사 건물 역시 이 분 설계이며, 그가 설계한 가장 유명한 건물은 루브르 박물관 입구의 유리 피라미드이다. 달라스와 홍콩, 파리의 우뚝 서 있는 에이엠 페이의 건물들을 돌아보니, 건축에는 일면식이 없지만 건물들은 매우 기하학적이고, 곡선이라곤 없으며 건물의 온 각도에 날이 곤두서 있다는 사실은 알게 된다. 크리스털, 콘크리트, 유리, 시청의 뒤집힌 피라미드 같은 형상에.... 삼각형/피라미드와 유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는 듯하다. 자연광이든 전깃불이든 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나고 참 예쁘긴 하다. 그러고 보면 빛을 받으면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쨍한 건축이라고 해야 할까? 각지고 뾰족하고 차갑고 거대하다. 구조 공학자인 남편은 이 분의 설계와 공법이 기술의 초절정이라며 무척 좋아하지만, 기술의 절정인진 몰라도 심리적 친화감을 주는 건물들은 아니올시다. 루브르 입구의 유리 피라미드가 지어졌을 때도, 차이나 뱅크 본사의 건물이 지어졌을 때도, 달라스 시청 건물에는 현재까지도 무시하지 못할 비난과 비판이 쏟아졌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그리고 그 비난들에 개인적으로 일정정도 공감하는 바이다. 또 하나 유감인것은 근래 세계각국의 미술관들의 신축과 증축의 경향은 이아엠 페이의 유리 피라미드에서 한발 더 나아가 유리파편 무더기를 쏟아놓은것 같은 디자인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것이다. 토론토의 로얄 온타리오 박물관 앞에도 어느덧 유리파편 덩어리를 쏟아놓은 듯한 모양의 신관이 하나 새로 생겼다는 소식이다.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해체주의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작품인데, 이 분 역시 프랭크 게리와 더불어 -해체주의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충만한 파괴본능을 건축물에 투여한 건축가다. 이분은 한국에도 서울의 코엑스 정면에 위치한 난해한 형상의 현대산업개발 본관과 해운대에 아이파크라는 일본도를 거꾸로 꽂아놓은것 같은 건물을 던져놓았다.



        35번 고속도로가 도심 한가운데를 통과하노라면 아이엠 페이의 크리스털 결정을 닮은 빌딩이 정면에 나타나고, 그 옆에는 달라스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미술관 옆 크리스털 모양을 한 빌딩이다. 이 빌딩의 정식 이름은 fountain place라고 알려져 있다. 미술관은 옆집 크리스털 빌딩과는 대조적으로, 살짝 비탈진 길 위에 지어져 4층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정면에선 보자면 나지막한 단층 건물로 보인다. 미술관 건물을 둘러싸고 긴 삼각형 모양을 한 가로수가 단아하게 심어져 있어 그 아래를 걸어보고 싶게 만드는 무척 정감 어린 길이다. 출입구는 정면과 후면 양쪽으로 나있는데 실내로 들어서면 복도는 약한 경사의 오르막을 오르고 오른쪽으로는 전시실 입구가 소리 소문 없이 나 있다.  복도를 따라 걷다가 자연스레 우회전을 하면 주제별 전시실이 펼쳐진다. 달라스 미술관이 무척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는 미술관의 복도와 전시실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실외 정원들 때문이다. 실내의 형광등 빛과 실외의 자연광을 일정 간격을 두고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자연 속에서 그림들과 예술작품들을 편안하게 즐기는 기분이 들곤한다.



        3층의 귀퉁이에서는 대문이 열려있는 저택을 만난다 참 뜬금없다 싶은 이 전시관은 La Paura라는 이름을 가진 대저택의 레플리카이다. 왠디와 에머리 리브스 부부의 생전의 소유였으며, 이 부부가 남기고 간 생전의 소장품 컬렉션이 실제와 유사하게 전시되어 있다. 어메리 리브스는 헝가리 태생의 귀화한 미국인이다.  성공한 출판업자이며, 상당한 재력을 소유하였던 덕분에 프랑스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들의 그림을 소집해왔다. 윈스턴 처칠의 2차 세계 대전 회고록을 비롯해 그의 저서 4권의 외국어 판권/출판권을 소유했었다. 반유태주의를 비판하였으며, 그 자신도 Anatomy of Peace라는 심각하고도 예리한 제목의 저서를 출판한 바가 있다.

  왠디 리브스는 코코샤넬의 패션모델이었는데, 그의 남편 에머리와 함께 코코샤넬로 부터 이 저택을 사들였다. 당대의 정치인과 문인들, 학자들과 교류하며 남불의 알프스 끝자락에 위치한 이 저택에서 화려한 사교를 이어갔다고 한다. 중국의 도자기와 정교하고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자개장식이 된 가구들로 저택을 가득 채웠다. 사후에 부부의 컬렉션은 모두 달라스 미술관으로 기부되어 전시되고 있다.



네덜란드 화가 몬드리안이 콤포지션의 바둑판같은 추상화를 그리기 전에 그렸던 여러 점의 풍경화들도 에머리 리브스의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다. 몬드리안은 굉장히 실험정신이 강했던 화가였던가 보다.



        모네의 수련과 자연풍광은 언제나 미소를 선사한다. 두 점의 소품이 화려한 액자에 담겨있다. 뉴욕의 모마에 전시되어있는 거대한 연못을 떠올리니 이 작품은 마치 미니어쳐같다. 프랑스의 산과 들도 한국의 산과들과 같은 모습이다. 저 산 너머 구름마져도...  


       에머리 리브스가 출판한 처칠의 회고록은 종전 후인 1953년 정치인 윈스턴 처칠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노벨위원회는 "for his mastery of historical and biographical description as well as for brilliant oratory in defending exalted human values”라는 수상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들 부부와 처칠은 굉장히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가졌으며, 처칠은 재임기관과 은퇴 후에도 이 부부의 별장을 자주 방문하여 휴식을 취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기에 처칠경과 이 출판업자 부부의 오랜 친분이 단절된 것은 처칠경의 부인이 왠디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처칠경의 방문이 중단된 시점과 왠디가 우울증을 앓게 된 시점이 겹쳐, 남편인 에머리는 그녀의 발병이 처칠경과의 중단된 우정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는 설이 있다.



        처칠경이 사용하던 식기와 그의 소장품들, 그리고 처칠이 은퇴 후 취미로 그렸던 풍경화 네 점을 만나는 공간이다. 이 부부의 저택에 머물 때면, 그의 이니셜이 새겨진 전용 식기세트들로 서빙을 했고, 에머리는 반클리프 아펠에서 주문 제작한 시거 케이스를 처칠경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귀여운 돼지 그림은 처칠경이 직접 그린 자화상이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처칠경에게 지인들이 종종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주문을 하면 이렇게 돼지 한 마리를 그려놓곤 했다. 실제로 처칠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사람은 그래험 서덜랜드라는 화가다. 영국 의회가 처칠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레엄 서덜랜드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서덜랜드가 그린 사실주의 화풍의 늙고 볼품없는 처칠의 초상화가 마음에 안들었던지, 두 사람간의 신경전은 대단했다. 처칠경이 은퇴한 뒤 초상화는 그들의 저택에 처박혀있다가 부인이 불태워 없애버렸다. 처칠 내외가 이 초상화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아는 왕실의 매이드가 불태워버린 것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https://web.archive.org/web/20120720013509/http://galleryoflostart.com/blog/artist/graham-sutherland/portrait-of-sir-winston-churchill/  



처칠경은 정물화와 풍경화를 즐겨 그렸는데, "Painting as pastime"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I know of nothing which more entirely absorb the mind…. the whole world is open with all its treasures.  The simplest objects have their beauty. Every garden presents mumerable  fascinating problems. Every land, every parish, has its own tale to tell. And there are many linens different from each other in countless ways and each presenting delicious variations of colors, light, form and definition."


처칠경의 문학적 재능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가 그린 그림들을 들여다보면 내게도 없던 용기가 생긴다. 그리면 되는 거다. 그릴 때 내가 기쁘고 친구들이 보아서 즐거우면 예술로서의 기능은 충분한것이다 라는...용기 말이다. 아, 그 전에 이미 쌓아둔 사회적  공로와 명망이 또한 필수 조건인가? 라는 의문이 들면... 그건 글쎄다.



        달라스 미술관에서 영국 수상의 그림과 저서를 발견한 것도 흥미롭지만, 그의 정신적 유산 역시 살아있다.  미국의 41대 부시 대통령의 기념관은 부시 가문이 이사로 있는 주립대 캠퍼스 내에 지어졌다. 내가 5년 간 장거리 운전을 하고 다니며 학위를 받은 그 학교 그 캠퍼스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43대 대통령이 되었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아들 부시 대통령의 기념관은 2015년 달라스의 한 사립대학 캠퍼스 내에 지어졌다. 43대 부시 기념관에서는, 은퇴 후 화가 수업에 전념 중인 부시 대통령이 그린 초상화가 전시 중이다. 몇 주전 조지 부시 대통령이 그린 911에 순직한 소방관들 66명의 초상화 전시회가 시작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한 순간 울컥했었다. https://www.georgewbushlibrary.smu.edu/ 


        내게 있어 그는 무척이나 과오 많은 남의 나라 대통령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본인 임기 중에 당한 911이라는 국가적 재난은 지도자로서 상당한 정치적인 멍에였을 뿐만 아니라, 자연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엄청난 정신적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재임기간 동안 해가 뜨면 미디어로부터 야유를 당하고 비난을 받는 것이 일과인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지도자로서 소임을 다하고 명예롭게 은퇴한 후에는 본인 임기중에 순국한 소방관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그들을 기억한다. 뉴스를 들었을 때,  퇴임한 미국 대통령에 대한 존경과 연민으로 잠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도자가 소임을 다 하고 은퇴한 이후에 할 수 있는 일 중에는 이런 것도 있지 않겠는가. 한국의 지도자들이 만들어 낸 비극적인 현재의 상황과는 너무나 비교가 되는 뉴스라 마음은 이내 참담해졌었다. 몇 주 전의 일이었다. 전시를 꼭 가보고 싶었으나 기념관 레스토랑에서 가졌던 지인 가족의 점심 모임이 길어진 이유로, 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겼을 때는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조만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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