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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onica Oct 18. 2020

발전 조급증

Lesson Learned

  또 도졌다. 발전 조급병. 직장 생활 이후 2~3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고질병. 가장 대표적인 증세는 불안감, 무력감, 나태해지기. 로봇처럼 매일 쌓아온 모든 루틴을 스스로 무너뜨리기. 지금껏 쌓은 모든 게 쓸모없어 보이면서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 낼 것만 같은 시간으로 되돌리고 싶어 한다. 이를 테면 대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 증세가 더 심할 땐 중학교 1학년까지. 어떤 순간이든 돌아가게 되면 “더 치열하게” 살아서 “더 발전된” 인간으로 완성되기를 꿈꾼다.



  이 고질병의 원인은 목표 상실이다. 치열하게 달성하고 싶은 당장의 목표가 사라진 순간. 목표물을 향해 팽팽하게 조여 있던 내 안의 모든 신경이 초점을 잃고 부유하기 시작한 순간. 뭘 해야 좋을지 몰라 불안한 마음이 자책과 후회로 전이되기 시작한다. 당장 큰 목표가 보이질 않으니, 매일 달성하고자 하는 사소한 목표가 하찮게 보이고, 부정적 기운이 뇌를 지배하니,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모든 에너지를 잃고 나태해지게 된다.


  초년생 시절, 이 병을 처음 맞닥뜨렸을 땐, 하루가 멀다 하고 일기를 썼던 것 같다. 그때 처음으로 밤에 혼자 집에서 와인 마시기를 시도해 봤고, 매일 밤 한탄하는 일기를 쓰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행히 당시에는 프로젝트 매니저에서 디렉터로 직책이 올라가면서 챌린지가 있었고, 새로 달성해야 하는 눈앞의 목표가 명확하니 쉬이 잊었던 것 같다. 두 번째 조급병을 마주했을 땐 결국 이직을 했다. 매일 밤 슬픈 일기를 쓰는 건 기본이고, 당시 동경하던 회사를 몇 개 리스트업 해 두고 그 회사에 다니는 사람 서칭을 엄청 했던 것 같다. 우울한 감정이 스며들지 않도록 로봇처럼 매일의 과업을 주입시켰고, 다행히도 원하는 회사로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3회 차 발전 조급병을 마주하게 됐다. 큰 플젝도 맡게 될 만큼 어느 정도 인정도 받았고, 웬만한 일도 다 손에 익어서 최대 효율을 내게 된 이 시점. 지금껏 내가 쌓은 모든 것이 소소해 보이면서 이대로 정체해 있다간 내 안에 가득한 야망의 에너지를 다 쏟아내지 못하고 끝나버릴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 뭘 해야 좋을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다, 결국엔 무기력해지는 이 순간이 또다시 찾아왔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이 병이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맞이한 비정상 상태가 아니라, 나처럼 야심 찬 사람이라면 평생을 지고 갈 숙명 같은 거라는 걸 이제는 인정하게 됐다는 거다. 지금껏 그래 온 것처럼 결국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찾아, 언제 그랬냐는 듯 조급병이 사라질 순간이 올 것이고, 발전을 위한 에너지를 모두 쓰고 난 후엔 또 다른 세계를 꿈꾸며 또다시 조급해질 날이 올 것이다. 결국 이 ‘발전 조급병’은 나라는 인간이 짊어지고, 함께 해야 할 평생의 숙제인 셈이다.


  지난 주말, 말 그대로 “하릴없이(어쩔 수 없이)” 소파에 앉아 읽은 카카오 페이지 <멋있으면 다 언니> 섹션의 이수정 범죄심리학 교수 인터뷰, <먼저 걸어가는 사람> (황선우 작가)을 읽으며 곤경에 처한 스스로를 어떻게 구해야 할지 조금의 실마리를 얻었다.


나도 다 포기해야 할 것 같은 순간이 있었지만 그날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의 최선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어요.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준비가 되어 있어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준비가 뭘까 하는 고민과 노력을 계속했던 것 같아요.


  이 ‘발전 조급증’은 나만 겪는 ‘특별한’ 문제가 결코 아닐 것이다. 자신의 재능과 에너지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 겪었던 순간이며, 우리는 고민의 시간을 도약의 에너지로 삼아, 스스로를 넘어서고, 새로운 세계를 만날 것이다. 그러니 유난 떨지 말 것, 조급해하지 말 것, 평정을 지킬 것, 무너지지 말고 충만한 하루를 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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