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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onica Oct 16. 2020

잃어내는 과정

소우주(小宇宙)


  올해는 참으로 죽음이 잦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향년 86세. 평생 건강하게 사시다가, 작년 겨울쯤 갑작스레 쓰러지셨고, 10개월쯤 앓다, 낮잠 자러 들어가신 길로 영면에 드셨다.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죽을 복’이 있다고 했다. 명절에 외갓댁에 가서 식사를 하고 나면, 할아버지는 복작복작한 집을 떠나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앞 작은 텃밭에 가 계시곤 했다. 그래서 늘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오래된 철제 자전거와 중절모가 떠오른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두 분 모두 체질적으로 건강하셨기 때문에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킨 이후 몇 십년간 둘이서 사셨다. 두 분은 유독 사이가 돈독해서 같이 낮잠을 잘 때에도 손을 꼭 잡거나, 껴안고 주무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난 한 번도 당신 미워한 적 없다”였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외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잠든 얼굴을 볼로 부비며 마지막 인사를 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빈소에서 하염없이 쓸어내리던 할머니의 동그란 손을 그려본다.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작은 집에 혼자 들어서는 할머니의 쓸쓸한 등을 그려본다. 깊었던 정만큼 깊이 패였을 할머니의 마음을 그려본다. 사랑으로 쌓아 충만해진 마음도 결국 쓸쓸해지고야 마는 ‘숙명’을 생각한다. 사랑이 깊어지는 만큼 잃어내야 하는 것, 그것 또한 인생이겠지.



개를 한 마리 기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식 낳고 싶은 생각이 더 없어져 버렸다

기르고 싶어서 기르지도 않은 개

어쩌다 굴러 들어온 개 한 마리를 향해 쏟는

이 정성, 이 사랑이 나는 싫다

그러나 개는 더욱 예뻐만 보이고 그지없이 사랑스럽다

계속 솟구쳐 나오는 이 동정, 이 애착은 뭐냐

한 생명에 대한 이 집착은 뭐냐

개 한 마리에 쏟는 사랑이 이리도 큰데

내 피를 타고난 자식에겐 얼마나 더할까

그 관계, 그 인연에 대한 연연함으로 하여

한 목숨을 내질러 논 죄로 하여

나는 또 얼마나 평범하게 늙어갈 것인가

하루 종일 나만을 기다리며 권태롭게 지내던 개가

어쩌다 집안의 쥐라도 잡는 스포츠를 벌이면 나는 기뻐 진다

내 개가 심심함을 달랠 것 같아서 기뻐진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불쌍한 쥐새끼보다도

나는 그 개가 내 개이기 때문에, 어쨌든

나와 인연을 맺은 생명이기 때문에

더 사랑스럽다

하긴 소가 제일 불쌍한 짐승이라지만

내 개에게 쇠고기라도 줄 수 있는 날은 참 기쁘다

그러니 이 사랑, 이 애착이 내 자식새끼에겐 오죽 더해질까

자식은 낳지 말아야지, 자신 없는 다짐일지는 모르지만

정말 자식은 낳지 말아야지

모든 사랑, 모든 인연, 모든 관계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되도록

이를 악물어 봐야지

적어도, 나 때문에, 내 성욕 때문에

내 고독 때문에, 내 무료함 때문에

한 생명을 이 땅 위에 떨어뜨려 놓지는 말아야지


- 마광수, <업(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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