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서 벗어나는 몇 가지 방법
어렸을 때 엄마 따라 간 백화점 가구 층에서 식탁 위에 깔끔하게 디스플레이 된 그릇 세트를 보면,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그릇이 좋아서 그랬던 건 아닌 것 같고. 당시엔 왜 그러는지 이유도 모르고,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외에도 칼선으로 오차 없이 잘린 색종이, 색을 맞춰 일렬로 서 있는 색연필, 줄 맞춰 진열된 원목 가구들을 보면 영문도 모른 채 심장이 뛰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인간에게는 '잘 정돈된 무엇'에 열광하는 본능이 있는 것 같다. 도쿄가 세계적인 여행지로 꼽히고, 사람들이 너도나도 짠듯이 ZARA에는 없는 유니클로만의 감성을 느끼는 것도, 한동안 인스타그램을 달궜던 'In my bag' 사진 구도가 여전히 클리쉐처럼 쓰이는 것도, 다 인간의 내면에 '잘 정돈된 무엇'에 대한 본능적인 열망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리고 이걸 정말 잘하는 게 일본 브랜드, 그중에서도 무인양품이다.
괜히 사람을 침착해지게 만드는 요상하면서도 이국적인 매장 음악, 디퓨저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레몬 그라스의 향기, 무채색 제품의 향연, 원목으로만 만든 가구들, 전부 같은 디자인을 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제품의 이야기를 하는 광고물까지. 어느 하나 튀는 제품이 없는데 무난한 제품이 한 데 모이고 나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매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매장이 주는 알 수 없는 안정감 때문인지, 한창 우울의 감정에 시달리다가도 무인양품 매장에만 들어가면 침착해지고, 카레든 도시락통이든 하나씩 사서 나오게 하는 묘한 '마력'을 지녔다. 소확행이라는 건 어쩌면 무인양품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우울기 무인양품 방문의 흔적들.
이직 이후 우울기가 왔던 이유가 처음 맡은 프로젝트가 잘 안 풀려서였는데, 우울감을 달래려 무인양품에 하루가 멀게 드나들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내 프로젝트의 영감을 많이 받았다. 고객에게 거부감 들지 않게 말을 잘 거는 카피를 정말 잘 쓴다. 다음은 무인양품의 잔잔한 광고 카피들.
집 가까이에 스타벅스가 생겨 '스세권'이 됐는데, 집 앞에 갈만한 카페 하나가 생기는 게 삶의 질을 얼마나 높여주는지 몸소 체험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스세권' 못지 않게 '무세권'도 중요한 것 같다. 무인양품이 내게 일깨워주는 일상의 가치. 바로 그저께 거울이 깨져서 곧장 무인양품으로 달려가 샀던 거울 포장 사진을 마지막으로 나의 MUJI 예찬기를 마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