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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onica Nov 09. 2018

연대 vibe

소우주(小宇宙)


몇 달 전에 좋아하는 작가 강연에 다녀왔다. 쿨한 라이프 스타일과 재기발랄한 글솜씨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수필가였는데, 두 시간 남짓한 강연 내내, 그녀는 대학 시절의 에피소드는 말해줬을지언정 출신 대학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근데 강연 내내 머릿 속에서 "왠지 연대 나왔을 것 같다" 하는 작은 울림이 계속 일었다. 나중에 집에 와서 찾아보니, 역시 그녀는 연세대학교 출신이었다. 나는 이 황당하고 흥미로운 경험을 '연대 vibe 사건'이라고 이름 지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내 목표는 변함 없이 '연세대'였다. 서울대도 아니고, 고대도 아니고, 꼭 연대여야만 했다. 왜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연대가 주는 세련됨과 도시적인 이미지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나이가 들어 다시 돌아보면, 조금 더 전략적으로 점수를 올렸어야 했던 것 같은데, 한낱 범인인지라 그런 전략은 세워보지도 못하고, 그저 '성실히' 공부를 하고, 드라마틱한 성적 향상은 경험해보지도 못한 채, 결국 연대는 못 갔다. 대학이 확정나고 혼자 방에 들어가서 신을 저주하며 1시간 정도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인생에서 마주한 첫 패배이자, 실패였다.


지금 같았으면 재수를 할지, 깔끔히 정리하고 즐겁게 잘 다닐지를 고민하고, 결정이 나면 후회 없이 따랐을 것 같은데, 그때는 그런 고민 없이 떠밀리듯 입학을 했다. 남들보다 1년 늦어지는 게 두려운 나이이기도 했고, 붙은 대학도 좋은 학교라는 주변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그냥 그렇게 입학을 했다. 그리고 한 2년 간은 '연대 트라우마' 같은 것에 시달렸다. 학교 밖에서 만난 사람이 (그놈의) '연대'에 다닌다고 할까봐 출신 학교를 묻는 게 두려울 때도 있었고, 버스를 타고 (그놈의) '연대'를 지날 때마다 우울감과 열등감 같은 걸 느꼈다. 연대생이라 하면 덮어놓고 질투를 하기도 했고, 내 인생에 도둑처럼 찾아온 이 실패가 무슨 의미인지를 곱씹기도 했다. 남 부럽지 않게 평탄하게 잘 꾸려온 인생이라 믿었는데,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 게 대단한 오점인양 호들갑을 떨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 거듭되는 실패와 작은 성취들로 찢어졌다, 기웠다를 반복하며 예쁘진 않지만 꽤 만족스러운 인생의 시간들을 채우고 있지만, 저 '연대 vibe 사건'을 겪으며 극복하지 못한 열등감이라는 건 참 잊히기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껏 살면서 '연대'를 못 가서 피해를 입거나, 될 일이 안 됐던 적은 없다. 스무 살 시절엔 잘 몰랐지만,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라는 게 참 중요한 것 같으면서도 중요하지 않은 거라, 고3의 좌절이 내 인생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던 적은 없다.


그러나 실질적인 피해를 겪은 것도 아니면서, 마음이 만들어낸 열패감이라는 생경한 감정은 생각지도 못한 때에 발현이 된다. 이후에 대학보다 더 중요한 '성공 경험'들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아마 그 열패감이 평생을 지배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연대 실패기'로 공개적인 글까지 쓰고, 어린 시절 '집착'을 개그 소재로까지 쓸 수 있게 되었지만, 극복하지 못한 열등감이 지배하는 인생을 상상해보면 아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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