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열여덟 자퇴생의 동남아 배낭여행
< 열여덟 자퇴생의 동남아 배낭여행 >
누구나 마음 속에 반짝이는 꿈을 안고 산다.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다 다르기에 꿈의 형태와 질감 역시 모두 다르지만,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상도 드물게 존재한다. "넌 꿈이 뭐야?" 하고 물으면 자주 들을 수 있는 말. '세계여행'이 바로 그렇다.
많은 이들이 바라기 때문인지 특별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세계여행'은, 사실 어찌 보면 가장 본능적인 꿈이다. 인간은 늘 시간, 공간, 사람,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마음마저도 낯설어지는 순간에 대한 갈망을 가진 채로 살아왔다. 중세에 신대륙(이라고 '유럽인들'이 생각했던 곳)을 발견하기 위해 쉴 새 없는 경쟁을 펼쳤던 것도, 냉전 시대에 우주와 가장 먼저 맞닿고 싶어 전 세계가 몸부림쳤던 것도 다 그런 마음들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어린이집(…)을 다니던 꼬꼬마 시절에, 내 세 가지의 꿈 중에서 가장 마지막이 '세계여행가'였다.(참고로 첫 번째는 인권변호사였고, 두 번째는 잊어버렸다.) 심지어는 열기구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는 세부적인 계획까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옅어져서 떠올려도 희미하게 가물거리는 기억이 되어버렸지만.
그 친구, 그러니까 'Aglai(아글라이)'를 만난 건 4월 중순의 일이었다. 우리 나이로 스물인 독일 친구 아글라이는 아시아 여행의 시작을 건축가인 아버지와 인연이 있는 한국에서 시작한 상태였다. 나는 그녀가 여행 가이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고, 연락처를 받아 남산 타워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며칠 후 용산에서 아글라이를 만났다. 첫 만남인데다가 영어가 서툴러서 긴장하긴 했지만 아글라이와 보낸 시간은 즐거웠다. 밝고 강인하며 똑똑한 그녀는 나와 여러 가지로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우리는 남산 타워의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사회와 역사에 관해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다. 청와대 둘레길을 걸으면서 서로의 가치관을 공유하기도 했다.
민감하지만 중요한 논제들을 다루는 시스템의 차이를 말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도달한 주제는 '교육'이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 내가 경험하던 한국 교육 체계와, 그 체계를 벗어나 새롭게 시작한 현재의 삶을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아글라이는 그 얘기를 듣더니 정말 멋진 선택이라고 응원해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교육 수준의 독일을 떠나 아일랜드 기숙 학교에 들어갔던 것, 사회와 문화를 공부하고 싶어 이번 가을에 네덜란드의 대학에 입학한다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 남는 시간에 아시아를 여행하기 위해 떠나왔다는 것. 본인의 인생을 확고하게 설계해나가는 아글라이의 태도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며칠 후에 이루어진 두 번째 만남은 한국에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주말에 다음 목적지인 일본으로 떠난다는 아글라이와 전쟁기념관을 둘러본 다음 내가 자주 가는 단골 카페로 향했다. 나는 아글라이에게 이번 아시아 여행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일본에 이어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여행하고 독일로 돌아갈 예정인데, 한국은 정말 특별해서 떠나기 싫다고 웃어보였다.
내게 결정적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다음 문장이었다. "Do you want join with me?" 부족한 영어 실력이라지만 그 정도 의미도 모를 리는 없었다. 갑작스럽지만 매력적인 제안에 너만 괜찮다면 함께하고 싶다고 대답하자, 아글라이는 좋다며 본인과 함께 여행할 친구들에게 동의를 구한 다음 다시 연락할 것을 약속했다. 아쉬운 마지막이거나 새로운 시작이거나. 둘 중 하나가 될 봄날의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글라이가 다시 연락한 것은 5월에 막 접어들었을 즈음이었다. 무산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고 있던 와중에 날아온 메세지는 예상 밖이었다. 5월 7일에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믿기지 않아 얼떨떨했지만 정말 기뻤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모험의 막이 당장 일주일 뒤에 올라가는 것만큼 두근거리는 일이 또 있을까.
배낭에 담아가고 싶은 꿈과 마음이 벌써부터 넘치는 중이었다.
언제 돌아올지 정확하지 않은 여행을 일주일 안에 준비한다는 것은 상상과 비교도 안 되게 어렵고 복잡했다. 싸야할 짐도 한 두 가지가 아니었고, 미성년자 신분으로 혼자 입출국을 하려면 알아놔야 할 것이 많았다. 나는 백패킹 전문가인 지인 분께 조언을 구하며 차근차근 출국을 준비해나갔다. 예기치 못했던 여행인지라 부모님이 경비를 지원해주시게 되었으니 최소한 다른 것으로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온갖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반복하며 빠르게 짐을 꾸림과 동시에 필요한 서류를 알아보고 현지 상황을 파악했다. 베트남이 미성년자 단독 입국을 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외교부 영사콜센터와 대사관에도 연락했고(그러나 베트남 대사관과는 단 한 번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베트남 국경일을 낀 탓도 있었으나, 다른 날짜에도 전화통화를 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메일까지 보냈지만 무응답이긴 마찬가지였다.) 현지 상황이 매번 다르다는 소식에 공증도 받았다. 게다가 비자 발급까지 겹치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물론 그게 다가 아니었다. 환전에 유심에 각종 티켓 예매까지…. 그래도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한 덕분에 출국 직전에는 강제로 여행 준비 전문가가 된 상태였다.
대망의 출국일은 고요하게 다가왔다. 5월 6일 저녁에 떠나 7일 새벽 하노이에 입국하는 일정이었는데, 공항 출발 직전 나와 다툰 엄마를(사실 일방적으로 혼났다. 근데 이유는 기억이 안 난다.) 뒤로 하고 아빠와 공항에 도착했다. 일찍 가서 기다려야 한다고 재촉한 아빠 덕분에 8시간 가까이 공항에서 대기해야 했다. 재밌는 것은 아빠는 힘들다며 수화물을 맡기자마자 공항을 떠났다는 점이다. 여러모로 웃긴 상황이었지만 혼자 남아 출국을 기다리는 것도 나름 신기하고 즐거웠다.
무엇보다 그 날마저도 변수가 생겼다. 함께 여행할 다른 친구 두 명이 7일 오전에 하노이로 입국하기 때문에 공항에서 그 친구들을 만나 같이 숙소로 갈 계획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들은 8일 오전에 입국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출국장에 들어가 7일 오전 8시에 공항에서 호스텔로 가는 픽업 서비스를 정신없이 예매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시간은 친지들에게 연락하는 것에 집중했다. 우선 친가의 할머니 할아버지, 외가의 할머니 할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아마 언젠가 다른 글에서 언급하겠지만, 나는 그 네 분께 특별히 큰 애정을 가지고 있다.) 전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손녀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괜히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여행 확정 후 일주일 동안 만났던 가장 소중한 친구들도 격려와 응원을 전해주었다.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한 다음 남은 건 이륙 뿐이었다. 미성년자 단독 입국에 대한 문제, 그리고 밤에 신청해서 확신이 안 가는 공항 픽업 서비스가 내내 머릿 속을 괴롭혔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넘기기에는 큰 사항임에도 그런 두려움에 지고 싶지는 않았다. 여권과 휴대폰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거라고 무식하게 마음 먹기로 결심했다.
그러던 와중에 이륙 준비가 시작되고, 마침내 비행기가 속도를 내 하늘로 떠올랐다. 피곤함이 밀려와서 일단 눈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비좁은 비행기 좌석조차 가슴 뛰는 모험의 출발지처럼 느껴졌다. 살아 돌아오기만 하면 되지 뭐. 그게 내 마음가짐의 전부였다.
결론적으로, 나는 살아 돌아왔다. 그것도 아주 건강하게 돌아왔기 때문에,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 그 좌충우돌 모험의 기억들을 풀어내려고 한다. 이건 그 방랑을 되새기는 순간들에 여러분의 동행을 요청하는 초대장이다.
Do you want join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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