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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즈 Sep 15. 2019

여행인 삶, 여행이 있는 삶

1-04 열여덟 자퇴생의 동남아 배낭여행


< 열여덟 자퇴생의 동남아 배낭여행 >

190507 ~ 190510 : 베트남 하노이 #3 (Hanoi, Vietnam)




DAY 3(Part.1)


이야기 음악 : Beatles - Blackbird


오늘도 여전히 하루의 시작은 샤워였다. 일어나자마자 씻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습했다. 게다가 하노이를 가득 메우는 주된 교통수단은 오토바이였다. 안 그래도 덥고 끈적이는 도시의 공기가 매연이 잔뜩 묻은 채로 몸을 에워싸는 기분이란…. (그래서 하루에도 천 번씩 샤워를 하고 싶었다.)


호스텔 최고의 인기 조식 메뉴였던 와플. 진짜 맛있다.

둘째 날 조식은 어제부터 내 후각을 자극했던 와플을 골랐다. 친절한 호스텔 스태프가 주문 직후에 직접 구워주는 와플은 인기 메뉴였다. 토핑도 선택할 수 있었는데, 초콜릿 시럽과 바나나의 조합은 환상적이었다. (내가 주문한 직후에 와플이 마감되는 걸 보면서 왠지 모를 성취감에 휩싸였다.) 시럽이 잔뜩 뿌려진 따끈따끈한 와플과 신선한 바나나를 휘핑크림에 푹 찍어 입 안에 넣을 때의 그 행복…, 그냥 최고. 너무 맛있어서 울지 않은 나 자신이 참 장할 뿐이다.


조식을 먹던 중 워킹 투어를 함께 했던 베르나르도가 다가왔다. "여기 앉아서 잠깐 통화해도 될까?" "당연하지." 괜찮다는 말에 내 앞자리에 앉은 베르나르도는 잠시 후 누군가와 즐겁게 전화 통화를 했다. 스페인어라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 자꾸 귀를 기울이게 됐다. 발음이나 말투, 억양을 듣는 것만으로도 은근히 재미가 있었다. 실제로 아직 긴 시간을 보낸 건 아니지만 이 호스텔에서 만난 사람들의 국적이 다양하다 보니 접하게 되는 언어들도 다채로웠다. 언어를 넘어서 문화와 가치관 등 여러 요소들을 인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몇 분 후 전화를 끝낸 베르나르도에게 물었다. "누구랑 통화한 거야?" "여자친구야. 지금 멕시코에 있어." "그렇구나. 여자친구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어. 근데 이 여행도 재밌어." 베르나르도의 우문현답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다음 문장이 놀라웠다. "내가 완전히 나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도 필요하니까. 이 여행 때문에 내가 더 성장하면, 모두에게 좋은 거잖아." 미소를 띤 베르나르도의 눈동자가 단단했다. 아마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나에게 변치 않고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어제 워킹 투어를 하면서도 느꼈지만 베르나르도는 참 생각이 깊고 멋있는 친구였다.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다 베르나르도가 일정을 위해 먼저 호스텔을 떠났다. 하노이 근처의 도시로 향한다는 베르나르도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건넸다. 아쉽게도 그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고 베르나르도와는 SNS 친구도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오래 기억에 남을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부디 베르나르도의 여행이 즐거웠기를, 그리고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지내기를!


조식을 다 먹고 친구들과 호스텔을 나섰다. 오늘의 첫 일정인 호아로 형무소(nhà pha Hỏa Lò)는 꽤 먼 거리에 있었다. 뜨겁고 축축한 날씨였지만 다 같이 씩씩하게 걸음을 재촉했다. 익숙한 거리도 지나갔다. 어제 갔던 하노이의 명소 기찻길 마을이었다. 밝을 때 보니 느낌이 새로웠다.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곳곳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풍경이 따뜻했다. 평범하지만 정다운 일상들은 마음에 은은하게 와 닿았다.


하노이 기찻길 마을(Trần Phú)

인물 사진을 가장 좋아하는 나에게 하노이의 사람들은 전부 눈부신 피사체였다. 아무것도 꾸며내지 않은 보통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었다. 사진 한 장에 세상 전체를 담을 수는 없겠지만, 이 찰나에 내가 느꼈던 감정과 기억을 녹일 수는 있기에 렌즈 안의 순간이 더 소중했다.


하노이 기찻길 마을 벽에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아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다.

기찻길 마을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다시 복잡하고 시끌벅적한 길들이 펼쳐졌다. 전부 처음 보는 도로와 건물들이었다. 하지만 구글 지도를 보며 앞장서는 아글라이는 거침이 없었다. (여행 내내 아글라이는 길 찾기 고수의 면모를 보여줬다.) 덕분에 조세핀과의 대화와 달려오는 오토바이 피하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든든한 아글라이를 따라 걸어가니 어느새 호아로 형무소에 도착했다. 티켓을 사서 들어가는데 밍키가 "한국에는 아직 사형 제도가 있니?" 하고 물었다. 나는 아직 제도는 있지만 실제로 사형을 실시하지 않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으며, 선고를 받아도 종신형처럼 감옥에서 평생 지낸다고 대답했다. 말하면서 장소의 특성 때문인지 이상하게 기분이 묘해졌다.


호아로 형무소 내부는 가라앉은 기분이 더 섬뜩해지게 만들었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였을 당시에 세워진 이 형무소는, 반 프랑스 항쟁에 참여한 정치범들과 베트남 독립 운동가들을 수용했던 곳이었다. 또한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미국군 포로들을 가두기도 했다.(2008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존 매케인도 이곳에 수용된 적이 있는데, 미국군 포로들이 유명 호텔 체인의 이름을 따 '하노이 힐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노이 호아로 형무소(nhà pha Hỏa Lò)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호아로 형무소의 규모가 크지 않을뿐더러 전시 자체에도 부족함이 많았으나, 아픈 역사를 알리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나 역시도 오랜 세월 열강들에게 시달린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그것을 넘어서 아시아 지역 사람들이 예부터 지금까지도 얼마나 큰 서러움을 안고 사는지 잘 알고 있기에 더 가슴이 저리기도 했다. 말수가 점점 줄어들수록 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 차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처음에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식민지 건설이 본격화된 이유도 결국 '호기심' 때문이었다. 콜럼버스는 본인이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그건 신대륙이 아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이미 그곳에서 그들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유럽인들은 개의치 않았다. 인도가 아닌 곳을 '인도'라고 부르며, 인도 사람들이 아닌 원주민들은 '인디언'이라고 이름 붙였다. 문명의 발전과 개척을 명목으로 원주민들은 끔찍하게 죽임 당했고, 다양한 문화는 욕망에 짓눌려 숨을 거뒀다.


물론 제국주의가 선명해진 세계 대전 직전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을 충당하려면 토지, 자원, 노동력이 더 필요했다. 초반에는 유럽 내에서 뺏고 뺏기는 진흙탕 싸움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함이 해소될 리는 없었다. 열강들의 시선은 기술의 발전이 더딘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이동했다. 잔악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게 그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는 아프리카 대륙의 경우 땅따먹기처럼 선을 그어 대충 국가를 나눠 가졌다. 문화의 형태를 고려하지 않아 전혀 다른 부족이 강제로 한 국가에 귀속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리고 그 만행들은 결과적으로 아프리카를 망가뜨린 수십 개의 끔찍한 내전을 불러왔다. 그렇다면 식민지 열풍이 심해진 이유가 전쟁에서의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 때문이었을까? 사실 그건 그저 '명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식민지 건설의 본질은 강대국들의 힘겨루기였다. 더 많이 '가진다'는 행위 자체는 곧 그들의 우월감을 증폭시키는 원천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강대국들은 "소유할 수 없는"것까지 탐냈다. 그게 바로 '사람'이었고, '국가'였다. 근대까지 이어진 계급 사회에서 '사람'을 소유하고 전쟁을 통해 '국가'를 차지하는 건 당연했지만, 세계 대전을 진행하며 열강들이 부르짖었던 것은 '발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진 '소유'에 대한 생각은 발전보다는 퇴보에 가까웠다. 진전을 위해 탈피해야 하는 과거의 낡고 잔인한 산물들은 도리어 아주 본능적인 방식으로 강력해졌다. 어떤 이들에게는 성장의 발판처럼 여겨졌던 역사가 어떤 이들에게는 뼈저리게 아픈 피의 시간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한국과 베트남은 모두 후자였다.(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이 이야기는 베트남 여행의 마지막 도시인 '호치민'편에 다다르면 할 것이다. 궁금하다면 방랑일기에 끝까지 동행해주시길!)


호아로 형무소의 기념품 가게에서 팔던 호치민 관련 상품들 / 항불 운동가들과 베트남 전쟁 영웅들을 위한 추모 공간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베트남이 한국보다 조금 더 나았던 것 같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붙잡힌 미국군 포로들을 호아로 형무소에 수용했었는데, 그 때문인지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호치민을 비롯한 전쟁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꽤 자세히 설명해놓은 야외 전시관 옆에는 굉장히 넓은 추모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기념품 가게에서 호치민 관련 상품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바로 그런 점이 한국보다 나은 부분이었다. 베트남 국민들은 지나온 역사와 그 역사를 일궈낸 주역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오랜 시간 이어졌던 베트남 전쟁은 힘겨운 세월을 버틴 국민들에게 완전한 독립을 안겨준 거대한 사건이었다. 또한 그 전쟁을 승리하게 만든 장본인인 호치민은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과소평가되기에는 아까운 대단한 리더다. 베트남 전쟁에서 많은 한국군들이 희생되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역사는 인정할 수밖에 없고 인정해야만 한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역사에서는 베트남이 거쳐온 과정이 전부 생략됐다. 양반들의 밥그릇 다툼에 고통받던 백성들은 곧바로 이어진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짓밟히고 죽어갔다. 몇십 년이 흘러 독립이 되었지만 그것 역시 자주적이지 않았기에 잔인하게도 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강대국에 의해 나라가 갈라진 다음에는 암울했던 독재 정권의 연속으로 또다시 몸을 웅크려야 했다. 그런 역사를 거치며 너무 많은 것들이 무너졌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은 이념 때문에 지워지고 그들의 후손은 일제의 잔재가 남은 사회에서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억울하게 죽은 민주화의 불꽃들을 억지로 붉게 칠하는 사람들도 아직 많다.


지나온 세월을 과장해서 부풀리거나 무조건 드높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란 것은 완벽히 객관적일 수 없고, 오히려 개개인의 생각에 따라 역사를 다르게 평가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하지만 형무소를 둘러본 후에 마음이 슬퍼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우리의 독립이 완벽하게 자주적이었다면, 그래서 이념보다는 행동에 주목하며 기꺼이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면…. 이상하지만 괜히 쓸쓸한 기분에 휩싸이게 되는 공간이었다.


호아로 형무소에서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서있는 관람객.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쓸쓸함을 느꼈던 이유도, 베르나르도의 말이 반짝였던 이유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름다웠던 이유도 내가 '여행'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생각을 비우고 정리하며 살아야 할 때도 있지만, 가끔은 생각을 아주 많이 해야 할 때도 있다. 여행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완벽하게 가능케 하는 행위이고, 덕분에 나는 그 공간에서 잊고 있었거나 몰랐던 것들을 최선을 다해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음껏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건 참 특별하고 감사한 것이다.


여행의 진면목도 사실 그런 부분이 아니던가. 아주 사소한 찰나도 배움과 깨달음이 되는 순간. 그렇기에 여행은 소중하다. 그리고 정말 필요하다. 우리는 생각하며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이니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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