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열여덟 자퇴생의 동남아 배낭여행
< 열여덟 자퇴생의 동남아 배낭여행 >
이야기 음악 : 장필순 - 방랑자
크메르와 힌두의 영향을 받은 참파 왕국(192년-1832년, 응우옌 왕조의 의해 멸망)의 문화, 독립 이전의 중국 복속 시기로 인한 중국의 문화, 프랑스 식민 지배의 흔적인 약간의 유럽 문화 등이 뒤섞여 만들어진 베트남의 독특한 고유성은 종교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노이 문묘(Văn Miếu- Quốc Tử Giám)는 바로 그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문묘(文廟)'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유교의 시조인 공자를 모신 사당인데, 1076년에 개교한 베트남 최초의 대학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문묘 관련 글에는 "시끌벅적 복잡한 하노이에서 여유를 즐기고 싶다면 가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았고, 마침 바쁜 도심의 리듬에서 벗어나 조금 쉬어가고픈 마음이 굴뚝 같던 우리는 호아로 형무소에서 나온 뒤 망설이지 않고 문묘로 향했다.
이번에도 역시 내비게이션 역할을 맡은 건 아글라이였다. 거침없이 앞장서는 아글라이를 따라 걸으며 조세핀과 대화를 나눴다. 호아로 형무소를 돌아보며 아우슈비츠가 떠올랐다던 조세핀은 나에게 "한국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감옥이 있니?"하고 물었고, 나는 서대문형무소와 한국의 고달픈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이 반복됐었다는 사실이 불현듯 씁쓸하게 와 닿았다.
도착한 문묘는 그런 어두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조용히 다스리기에 알맞았다. 방금 전까지 매연이 가득한 거리를 지났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우아한 모습에 감탄사가 나왔다. 마치 하노이가 아닌 전혀 다른 세상에 와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사실 유교 사상의 발원지인 중국과 비슷할 정도로(어떤 부분에서는 중국보다 더) 유교 문화를 오랫동안 간직해온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문묘가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유교와 불교, 힌두교가 함께 공존하며 자리 잡은 새로운 종교적 정체성은 베트남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만큼,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문묘는 흥미로운 장소였다. 게다가 차분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긴장된 마음의 피로를 조금 덜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불어 이곳의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먼 곳에서 떠나온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이 무척 많다는 것이었다. 배낭여행을 하며 다양한 명소들에서 머물렀지만 하노이 문묘만큼 현지인들의 비율이 높은 곳은 없었다. 이 담담하고 평화로운 장소가 베트남 사람들에게도 소중한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느린 호흡에 맞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카메라 렌즈에도 생생히 담겼다. 간단한 말이나 손발짓으로 촬영에 대한 동의를 구하면 다들 환하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심지어 사진을 찍어 달라며 호쾌하게 내 앞으로 와 포즈를 취하는 어르신 분들도 계셨다. 사진이란 삶의 짧은 찰나를 영원히 기록하는 일이구나. 그 날, 나는 이제껏 사람을 찍을 때 가장 행복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문득 깨달았다.
그래서일까? 내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여행 사진 대부분이 하노이 문묘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바로 위 사진 속의 아이들도 기억에 남는 모델이었는데, 말간 웃음과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명랑함이 무척 사랑스러워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바라보다 인솔하던 선생님에게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던 게 떠오른다. 원색의 옷차림보다도 더 선명한 눈동자들은 아직까지도 사진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을 들뜨게 하는 원천이다.
유치원 아이들을 비롯해서 문묘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는 다채로운 피사체였다. 문묘의 관리인들이나 타국의 여행자들, 다양한 지역에서 찾아온(혹은 마실 나온) 베트남 사람들. 낯선 이가 자신의 모습을 담는 것을 너그러이 허락해주고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미소를 보여주는 건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기에, 예나 지금이나 사진첩 속의 사람들과 그 순간의 다정함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며, 이런 추억의 조각들 덕분에 다음 여정의 퍼즐을 찾아 떠나가고 싶은 것이리라.
이렇게 문묘의 사진들은 나에게 유난히 특별하기 때문에,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과 공유하고픈 사진 몇 장을 더 가져왔다. 혹여나 글의 흐름이 끊기지는 않을까 고민했으나 그래도 이 따스함을 나 혼자 간직하는 건 못내 아쉬워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문묘를 걷던 중 단체로 관광을 오신 것 같은 어르신 분들을 만났다.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한 분이 나를 보시고는 다른 분들께 내 카메라를 가리키셨다. 그러자 어르신 분들이 전부 내쪽으로 몸을 돌리셨고 나는 기쁘게도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친구들에게로 돌아가려던 순간, 오른쪽 사진의 어르신 분들이 내게로 다가오셨다. 베트남어를 하지 못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본인들을 찍어주길 원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당연히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촬영한 후 쉬운 단어 몇 개를 대가며 사진을 보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르신 분들은 굉장히 쿨하게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드셨다. 아직도 그 모습이 머릿속에 또렷한 이유는 아마 그분들의 순수함과 호탕함이 감사해서였을 것이다.
이 여행자는 문묘 건물 중 한 곳의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생각에 깊이 잠긴 채 온화한 공간에서 숨을 돌리던 그의 모습은 마치 영화의 주인공과도 비슷했다. 그러다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 목에 걸린 카메라를 보고 마음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고요하고 잔잔한 찰나에 가득 찼던 그의 미소가 내 카메라에 담길 수 있었다는 건 참 행운이다.
주변에서 "여행에서 찍은 것 중에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 뭐야?"라고 물으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보여주는 사진 두 장. 문묘에서 나와 숙소로 출발할 때 왼쪽 사진 속의 이발사 분과 이발을 받던 손님을 보게 되었다. 문묘 돌담길에 걸린 거울과 모자, 손님이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이던 낡은 의자, 세월의 흔적이 묻은 이발사 분의 주름진 손.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리고 나의 시선은 옆쪽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노신사 분들께 옮겨갔다. 두 분은 렌즈를 보고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옮기는 나를 향해 "Happy!"하고 외쳤다. 처음에는 얼떨떨했지만 그 문장을 한 번 더 듣고 나서는 나 역시 활짝 웃었다. 지금 이 순간이 Happy였을지, 혹은 Happy라는 말로 나를 격려했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어떤 의미가 있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무슨 뜻이었건 간에 나는 정말 큰 선물을 받았다. 아주 귀하고 소중한 '행복'이라는 선물을 말이다.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위로를 건네는 것 같던 문묘는 여전히 몇 장의 사진만으로도 나를 다독이고 있다. 어쩌면 평생 동안 알지 못했을 순간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와 그 기회가 내게 찾아왔음을 감사하게 만들었던 사람들. 지금의 내가 예전의 나보다 더 많은 세상을 사랑하며 살고 있어서, 무척이나 기쁘다. 그리고 신난다. 앞으로 더 많은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찾아올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날 밤 나에게 찾아온 건 '최초의 충격'이었다.
To be continued…
*본 글에 사용된 사진은 모두 글쓴이 본인이 촬영했으며, 정면으로 얼굴이 나오는 경우 전부 당사자의 동의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