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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틴 May 03. 2023

내 안의 친밀하고도 낯선 이방인

'친밀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 <친밀한 이방인>


이 이야기는 물리적으로는 자랐지만 내면으로는 성장하지 못했던

내가 곧 삶의 의미가 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그러나 폐허가 되고 나서야 마침내 다시 출발선에 설 수 있게 된 그녀들, 그리고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에는 여러 명의 여성 화자들이 등장한다.

아나스타샤, 이유미, 이안나, 이유상, 엠 등으로 불리던 이유미,

액자 밖에서 소설을 이끌어 가는 ‘나’,

‘나’의 엄마, 이유상의 부인이었던 진, 진의 엄마 등 수많은 여성 화자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이들은 모두 나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고 삶을 살아가고 싶었지만, 그게 너무도 어려웠던 사람들이다.


이유미가 처음 배웠던 것이 실체로서의 피아노가 아닌, 허상과 허황의 피아노였던 탓일까. 그녀는 자신의 현실에서 아주 벗어난, 사회적 기준, 타인의 잣대에 내내 자기 자신을 욱여넣는다. 그러느라 정작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은 무슨 의미로 존재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점점 가짜 의미의 세계로 빠져든다. 사회적 기준에 맞춰 실제적인 노력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녀의 노력은 신분 위조, 학력 위조, 사치품 과소비 등 그야말로 허황된 것뿐이었다. 꽃마저도 이름을 불러줘야 의미로 다가온다고 하는데, 신분을 옷 바꿔 입듯 바꿔가며 살아온 그녀는 스스로에게 의미가 되지 못한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나'는 어떠한가. 결혼을 하고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하며 자신이 세워 두었던 인생의 궤적에서 점점 멀어짐을 느낀다. 한순간에 바뀐 자신의 삶에 조금씩 자신을 갉아먹으며 살아가다가, 점점 자신을 깊은 심해 밑으로 끌고 간다. 그러다가 이유미의 삶을 추적해 나가며 본인 삶의 의미 역시 추적해 나간다.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 폐허가 된 길목에서.




하지만 그들은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 폐허가 된 길목에서’ 자신들의 진짜 삶, 진짜 의미를 마주한다.

작가인 ‘나’는 이유미의 삶을 추적하다가 자신의 마음 밑바닥을 마주한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나는 애초에 아내와 엄마가 될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아’라는 마음속 깊숙이 숨겨두었던 말을 토해내고서야 그녀는 새롭게 출발선에 설 수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괴롭혔던 목에 걸린 생선 가시를 빼낸 듯이.


평생 가족들의 뒷바라지만 하던 ‘나’의 엄마는 남편이 암에 걸렸다는 이야길 듣자마자, 자신의 인생을 찾겠다고 황혼 이혼을 통보한다. 이렇게 쉽게 죽음이 다가올 수 있는데, 이렇게만 살다 갈 수는 없다고.

엄마의 기대에 맞춰 사는 데에 번번이 실패해 본인이 실패자라고 생각해 왔던 진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적 규범 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해야 하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왔던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 ‘엄마의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그러므로 나는 이유미가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폐허에 폐허까지 경험한 그녀는, 결국 자신의 마음속에 흰 돛단배를 만났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비로소, 마침내, 그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TV 시리즈 <안나>에서 그렸듯,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사회적 기준, 규범, 타인의 잣대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내가 좋아해서’, ‘내게 의미 있어서’가 아니라, ‘가족’에게 인정받고, ‘사회적으로’ 촉망받는 대학에 들어가고, ‘남에게’ 인정받는 직업을 갖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던 우리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 삶의 주도권을 누군가에게 내어주고, 그들에게 의미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정작 그들은 우리 삶에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데 말이다.


‘친밀한 이방인’.

이 얼마나 모순적인 단어의 조합인가. ‘친밀함’과 ‘이방인’은 대개 상호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이질적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우리 자신은 그야말로 ‘친밀한 이방인’이 아닐까.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 모른 채 바다 위를 부유하다 어느 순간 물 표면에 비친 나를 바라보면 내가 정말 누구인지 모르겠는 것처럼.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는, 기억이 날 것 같으면서도 나지 않는 ‘누군가’의 얼굴은 바로 ‘내’ 얼굴이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인생의 마지막 문턱에서야 진짜 삶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죽음’, ‘인생의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 나를 끝까지 밀어붙이고 마주하고자 노력한다면 내 안의 ‘친밀한 이방인’은 어느새 ‘친밀한 나’가 되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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