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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틴 Oct 24. 2020

시댁에서의 첫 명절 성공기

서있는 병풍 며느리, 와인 마시고 코 곤 며느리! 여기있어요


나의 취미 중 하나는 네이트 판 글 읽기.

특히 결혼/시댁/친정 즉 결시친 탭에 들어가면, 그 어떤 곳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막장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어 일상의 빈틈을 소소하게 채우는 재미가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네이트 판의 각종 막장 스토리들의 바다에 표류하다가, 나의 시댁에서의 첫 명절이 떠올랐다.

장르는 독자들이 기대하는 막장은 아니다. 소소한 코미디 영화 정도라 할까.



듣기만 했던 명절 최고의 빌런, 전.


서있는 병풍 며느리

나의 친정은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라, 제사에 대한 알 수 없는 포비아가 있었다. 제사 포비아에는 당연히 네이트 판이 큰 지분으로 일조를 했다. 네이트 판의 막장 이야기들로 지레 겁부터 먹은 나는 결혼 전부터 남편에게 제사 지낼 때 사진 좀 찍어 오라고 시켰고, 나 과일 못 깎는데 시키시면 남편이 해야 한다고, 나 혼자 전 부치게 하면 친정 엄마랑 남편 둘만 백화점에 남겨두고 사라질 거라고 신신당부를 해왔다.

그랬던 내가 결혼하고 첫 명절을 앞에  것이다.


남편과 시아주버님 댁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아들 셋의 부부가 탑승을 했다. 아들 셋이라니, 너무 힘들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나이가 나보다 다섯 살쯤 많아 보이는 여자분은 한숨을 쉬며 "전을 또 얼마나 부칠는지. 기름 냄새 진짜 싫다"하니, 큰 아들로 보이는 아이 왈 "난 전 좋은데". 그들은 우리보다 한 층 전에 내렸고, 나와 남편의 눈이 마주쳤다. 설마 저게 내 미래인가,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우리가 도착하자, 시어머니께서 밥을 차려주셨다. 이렇게 차려주신 밥을 먹어도 되는 건지 고민을 잠시 했지만, 배가 고파 빠르게 흡입했다. 밥을 다 먹고 나니, 본격 음식 준비의 시간이 돌아왔다. 방금 먹은 밥은 일 삯이로구나,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한 여자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전 탑을 쌓고 있을까. 마음의 준비를 위해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자, 등심, 새우, 산적, 생선 등등 내 앞에 엄청난 전 재료들이 펼쳐졌다. 다만, 네이트 판의 이야기들과 차이가 있었다면, 이미 다 손질이 된 재료들이었다는 것. "니 아빠도 글코 나도 글고, 굳이 니네 일 시킬라고 기다릴 성격이 몬 된다. 어제 둘이 다 했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시집 한 번 잘 온 것 같아요. 하여 나랑 남편이 한 일은 고작, 다 되어있는 전 재료에 앞뒤로 밀가루를 묻히기 뿐. 그마저도 해서 드리면 토시를 팔에 끼고 기름에 튀기고 부치는 건 어머니셨다. 갬동의 쓰나미 현장.


그러다 보니 사실상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옆에 가만히 서서 어머니의 움직임을 눈에 익히고, 중간중간 그릇을 닦거나, 일반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를 분류해 버리는 것뿐. 그야말로 서있는 병풍이었다.



삐뚤어진 사진, 삐뚤어진 우리의 코


와인 좋아하는 며느리와 와인 파티 투나잇

저녁이 되었고, 우리는 집주인인 시아주버님을 격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는 시아주버님이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기 때문. 아주버님께서는 오랫동안 여자 친구가 없으셨고, 그래서 우리가 먼저 결혼을 했던 터였다. 그랬던 아주버님께 여자 친구가 생기셨다니! 그것은 희소식 중 희소식인 셈. 7시 반이 지나 아주버님이 오셨고, 우리는 어머님께서 해주신 불낙새에 와인을 마시며 파티를 시작했다. 어머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건 스파클링 와인, 아주버님과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찐찐한 레드 와인. 그래서 우리가 준비한 와인은 이탈리안 스푸만테와 아르헨티나 트라피체 말벡이었다. 나훈아 콘서트를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10시. 아주버님이 갖고 계신 레드 와인을 한 병 더 까고 나서야 파티는 자정 즈음 마무리가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도저히 설거지를 못 하겠다고 하셨고, 훈훈하게 나와 남편이 설거지를 하겠노라고 하며 마무리하고 잠이 들었다.


무리 좋은 시댁이라지만, 잠은 또 다른 문제였다. 잠이 들긴 들었지만 깊게 잘 수는 없었다. 초등학생 이후로는 친척집에서조차 잔 적이 없던 나였다.

잠이 깨다 말다 하던 새벽녘 즈음, 어디선가 탱크 소리가 울렸다. 아니, 뱃고동 소리일까. 부우우우우우웅.

혹시 아버님의 소리인 건가 하고 옆자리를 보았는데, 남편이 있어야 할 곳이 비어있었다. 그렇다. 그건 내 남편이 화장실에서 내는 소리였다. 역시 남편은 속이 편하구나, 하며 다시 잠에 들었다.


"니도 어제 그 소리 들었제, 윗집 아랫집 다 깨는 줄 알았다"

폭풍 공감을 하며 웃는 나에게 남편이 얘기했다. "힝구 어제 코 골았어. 드르렁드르렁"


시댁에서 자면서 코까지 고는 며느리가 있다니, 그것은 바로 나였다. 몹시 겸연이 쩍었다.




우여곡절 많았던 첫 제사상


와인 파티의 후유증

방귀를 뀐 남편, 코 곤 며느리. 와인 파티의 후유증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과음한 탓에 어머니께서는 아침부터 허둥지둥이셨다. "아, 어제 술 그렇게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었는데." 아침 8시까지 준비가 돼야 하는 제사 음식은, 7시 반이 되도록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도움을 요청하셨는데, 아버님께 주어진 미션은 마른 북어포의 눈알과 까만 꼬리 끝부분을 다듬는 것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미션을 수행하고 있을 무렵, 어머니의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 눈 쪽만 떼라고 했더니 머리를 댕강 자르면 어짜노. 꼬리는 또 왜 이렇게 몽창 잘라놨노. 몬 산다." 그렇다. 아버지는 눈알과 꼬리 끝 부분을 '조금' 다듬으라는 미션을, 과감하게 '북어의 얼굴과 꼬리 5cm를 잘라내는 것'으로 컴플리트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해명을 계속 요구하셨으나, 아버지께서는 "꼬리는 이 정도는 잘라 줘야지"라고 당당하게! 마! 남자답게! 마주하실 뿐이었다. 결국 그 날, 접시에 올라간 것은 댕강 잘라진 북어의 얼굴과, 목부터 꼬리의 중간 부분까지 이어진 몸통이었다.

 






나의 첫 명절기에는 다행히도(독자들에겐 불행히도) 네이트 판에서 읽고 읽었던 그런 스트레스 만땅인 막장 이야기는 없었다. 오히려 외동딸인 내가 복작복작한 명절 느낌을 오랜만에 느껴본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어쩌면 해가 지날수록, 이 글을 썼던 것을 후회하며 힘들어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첫 명절기는 해피 엔딩이었다. 첫 명절을 앞두고 있는 전 세계 신혼부부 며느님들,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50프로의 확률로 최악을 염두하고 가면, 반전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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