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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트 Sep 28. 2021

신발공장

겨울 방학 한 달짜리

윙윙, 드르륵드르륵
기계 소리가 요란하다

겨우 15살, 그래도 아줌마들 사이에서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바로 옆에 엄마가 계셨기에 가르쳐주시는 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는 없었다. 나란히 그 옆으로 아는 동네 아줌마들도 애가 와서 이런 것도 하니 기특하다며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좋아라 해주셨다. 나름 공장장의 눈치 봐가면서 수다 떠는 아줌마들 틈에서 소외되지 않고 즐겁게 그리고 엄마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뿌듯함으로 잘 다녔다. 고입 학력고사를 치르고 난 뒤 합격 발표 전 일한 그곳, 겨울방학 한 달짜리 신발공장은 생전 처음 돈을 벌어본 귀한 경험이었고 월급명세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누런 그 봉투 안의 것이 생애 첫 노동의 대가였다.


illustrated by 반트 ( clematis* )

   딱히 기술도 없는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신발공장을 다니신다. 그 시절 부산에는 대규모 공장(국제상사, 동양고무 등)부터 소규모 동네 공장까지 엄청나게 많다. 두 집 건너 한집에 신발공장 다니는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엄마도 동네 아는 아줌마들의 소개로 쉽게  일을 시작한다. 오늘 하루 몇 족을 해야 한다는 공장장의 높은 목소리와 함께 젊은 기술자들은 미싱을 밟고 돌리면서 아주 바쁘게 신발을 공정 순서대로 만들어 나간다. 고무 본드 냄새가 고약하게 공장 전체에 진동을 하고 요란한 미싱들의 소리뿐만 아니라 신발끈 구멍을 내기 위한 기계소리까지 엄청난 소음 수준이어도 다들 적응해 익숙해진다. 소규모 공장들은 하청업체들이라 무척 바쁜 시기에는 잔업(야근)까지 하면서 목표 달성의 신발 족수를 채우는 일이 비일비재한다. '프로스펙스' '까발로' '르까프' '월드컵' 등 생각나는 몇 가지 브랜드다. 추억 돋는다.


   엄마가 언제까지 신발공장을 다니셨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 그 일을 시작하실 때는 기술이 없으시니 시다(보조)로 신발 풀칠을 하거나 실밥을 뜯는 가위질을 많이 하셨는데 나중에는 미싱을 배우면서 신발 끈 아랫부분 '설포(Tongue)'를 잇는 작업을 하신다. 그때는 '베라' 붙인다라고 하신 기억이 있다. 아마 공장에서 쓰는 용어들은 표준어와 많이 다를듯하다. 매일 퇴근 후 공장에서 있었던 일을 저녁 밥상에서 말씀하실 때 어떤 상황인지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왜 그래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를 다행히 다 이해할 수 있다. 짧지만 그 한 달 경력이 엄마의 공장 생활은 어떤 환경인지 더 잘 알 수 있고 공감하는데 모자라지 않다. 엄마의 인생에서 신발공장은 힘들었지만 그때 그 시절 부산에서 가장 활발한 산업이고 두 딸을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한 생계 수단이 된 엄마의 직업을 만들어 준 곳이다.


   아침부터 잔업까지 해도 두 딸을 키우시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니 또 다른 일을 집에서 할 수밖에 없지 싶다. 가내 수공업으로 일감을 가지고 와서 집에서 하신 일 중에 낚싯줄 만드신 일이 생각난다. 소주병에 알코올 담고 다 쓴 치약 윗부분을 잘라서 긴 면 헝겊을 양초처럼 심지를 만들어 끼운다. 알코올램프의 가난한 버전처럼 보인다. 그런 다음 낚싯줄 끝을 고리처럼 말아서 불에 살짝 녹인 다음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서 비비면 딱 붙는다. 실제로 어떻게 낚싯줄이 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씩 해서 백개씩 묶어서 완성하여 갖다 주면 얼마나 받았을까? 인형 눈알 붙이는 일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또 다른 일감으로 낚시 그물을 만드시기도 한다. 특수한 모양의 나무 바늘을 이용하여 그물 제작을 한다. 이 일은 일감이 많지는 않다. 신발공장에서 퇴근을 하고도 밤늦게까지 또 주말에도 낚싯줄을 만드시면 그 옆에서 개수에 맞게 묶어서 정리를 해드리기도 한다. 소주병 램프에 직접 엄마처럼 시도해보기도 하고 불량 나면 서로 웃으면서 까르르 대기도 한다. 그래도 행복하다.


   또 하나의 신발공장 기억이 난다. 월말이면 보험료를 수납받아야 하는 업무를 하는 입장에서는 계산이 틀리지 않으려고 신경이 최고조로 곤두선다. 업무 편의상 가마감이라는 과정에서 계약자들의 월 보험료가 월말까지 입금이 된다고 가정하고, 여사님(보험 설계사님 부르던 호칭)들이 2~3일에 걸쳐서 입금하시는 것이다. 그 시절엔 그 과정에서 미납되는 금액들이 종종 존재한다. 지금처럼 자동이체 같은 시스템보다 여사님들이 직접 수금을 해서 회사로 대신 입금하는 업무가 99%이기에 아마도 관례처럼 해온 일들일 것이다. 그 어떤 달에 한 여사님이 약 60여만 원 정도의 가마감이 미납되는 사고를 치신다. 보험료가 회사로 입금되지 않으면 계약자 영수증 회수가 필요한데 아마 대부분 계약자에게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 계약자들은 보험료를 여사님에게 납부를 했지만 회사로 입금이 되지 않은 상태가 발생하거나 간혹 계약자들의 보험 실효를 방지하기 위해 대납을 하시는 경우도 예상된다. 여사님의 다음 달 월급이 담보되기에 일단 이 정도 미납금을 영구히 못 받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판단한다. 그렇지만 업무상 가마감 미납은 무조건 수납하는 것이기에, 결국 그 여사님이 어디 신발공장에서 일을 봐주시고 계신다는 정보를 듣고 다음날 영업소 문을 걸어 잠그고 무슨 빚 받으러 가는 업자처럼 동래시장 구석에 있는 신발공장을 급습한다. 여사님 놀라신다. "김양아, 니가 우째 여기를 다 왔노?" 대답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입금이 안되었으니 그거 받으러 왔죠." 수표밖에 없어서 (그 당시엔 수표가 바로 현금화가 되지 않고 다음 날 오후가 지나야 찾을 수 있다) 그렇다는 거짓말을 눈치채고 만다. 하지만 누구냐? 4시간을 조용히 기다리고 중간중간 은행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입금 확인을 하면서 그 돈을 받아 유유히 그 신발공장을 빠져나온다. 그렇게 그 예전의 요란한 신발공장의 미싱 소리가 기억에서 옅어지면서 신발공장도 부산에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클레마티스 (Clematis)의 꽃말은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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