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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트 Sep 29. 2021

보험회사

89년 1월 입사 ㅣ 92년 6월 퇴사

매일ㆍ매달ㆍ매년
영수증과 고군분투하다

8시 30분, 출근 후 사무실 청소를 한 뒤, 어제 마감 후 들어온 계약서 혹은 보험료 입금이 있으면 장부에 기입하고 영수증 정리를 하는 것이 업무 시작이었다. 소장님이 오시면 커피 한잔을 타서 드리고, 다른 영업소의 선배 언니, 동기와 짧은 수다를 떨다 보면 금세 시간이 지나갔다. 여사님들의 출근 시간이 되면 조용하던 사무실은 활기를 띠며 영업 시작이 된다. 아마 요즘도 영업사원들이 북적되는 곳이라면 비슷한 분위기라 상상된다. 소장님의 영업 독려 조회가 끝나고 여사님들이 우르르 몰려오신다. 그렇게 휘몰아치고 나가신 뒤, 라디오를 듣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보험회사는 좋은 기억이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illustrated by 반트 ( begonia* )

   뒹굴대던 고3 여름방학, 학교 직업보도실에서 전화가 왔다. 제일생명 원서가 들어왔으니 교내 면접을 보러 오라신다. 그런 회사도 있었나? 엄마는 들어본 적 없다신다. 그래도 면접 때를 대비해 미리 사둔 깔끔한 화이트 블라우스와 무난한 네이비 치마를 입고 학교로 간다. 각반에 1명씩 뽑았다고 하셨는데 우리 반엔 2명이다. 누구지? 그 친구다. 다행히(?) 입사 동기로까지 이어졌지만 깊게 친해지진 못하겠다. 이뻐서 차별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능력이 된다. 합격통지를 받고 수월하게 취업 걱정 없이 남은 3학년 2학기를 보내면서 마지막 학창 시절이라 생각해서인지 신나게 한 학기를 보내고 졸업한다. 그런데 성적은 제일 좋다. 왜지?


   3개월 수습기간 딱지를 달고 영업국에서 가장 바쁜 영업소에서 엄청 야무져 보이는 3년 선배 언니와 함께 일을 시작한다. 설계사 경력을 갖고 계셨던 여자 소장님은 시원시원한 목소리에서부터 카리스마 뿜뿜 나오신다. 자잘한 심부름과 영업소 하루 일과를 터득하면서 때론 실수를 하여 혼도 나고, 잘했다는 칭찬도 들어가면서 1년여를 보내고 난 뒤 크지 않은 영업소로 발령이 난다. 이제 오롯이 혼자 서류철, 영수증철, 장부기입, 그리고 여사님들 대하는 태도 등등 매일, 매달, 매년 반복되는 업무와 책임이 주어진다. 마감 후 계산이 달라 모자라도, 남아도 안 되는 일이기에 처음엔 무섭기까지 한다. 그래도 잘 해낸다.


   여사님들의 오전 업무가 끝나면 다들 외근 나가신다. 다시 조용한 사무실엔 소장님도 나가시는 경우가 많기에 라디오를 친구 삼아 일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분위기다. 그래서인지 점심시간 이후 두세 시간이 정말 좋다. 입금된 영수증과 돈을 맞추어 장부에 기입하고 돈을 챙겨서 은행에 입금하면 제일 중요한 하루 업무는 끝이 난다. 이렇게 매일 하는 업무가 반복되다 보면, 한 달의 끄트머리가 금세 다가온다. 그렇게 월말이 되면, 몰아치는 영수증과 딱 맞아야 하는 돈다발을 세던 손가락이, 영수증 수납 도장을 찍던 팔이, 틀리면 안 된다는 압박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던 눈알도 아파온다. 제시간에 입금하지 않으시는 여사님들 덕분에 머리는 깨지기 일보직전이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한 달 마감을 마치면, 바쁜 월말이 지난 매월 초는 어김없이 다가온다.


   월초가 되면 지난달의 흔적을 정리하고 보관하는 업무를 시작한다. 이때 배운 영수증 철은 나중에 프린트 자료들이 이쁘게 책으로 변신하는데 유용하게 쓰인다. 또한 영업국에서 회의가 있는 날이면 나름 영업소를 벗어나는 외출이 되는 느낌이라 괜스레 일 대신 땡땡이 같은 기분도 든다. 이른 나이에 일을 시작해서인지, 여사님들 상대를 해야 하는 일이여서인지, 걸려오는 계약자들 전화 상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소위 말을 하는 스킬이 늘고 얼굴도 두꺼워지고 풋풋함은 사라지는 어른이 되어간다. 물론 돈을 벌어 쓸 수 있는 상황도 어른이 되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게 매달이 매년이 되던 어느 날 3년 6개월 정도를 근무하고, 고군분투하며 마주한 영수증들과 이별을 한다.


   89 입사 동기들 오리엔테이션이 서울에 있어 밤 기차를 타고 도착한 서울역 앞 어느 포장마차에서 가락국수를 먹으면서 해가 뜨길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전국에서 모인 입사 동기들이랑 여러 교육을 오전 내내 받던, 사내 식당에서 식판 밥을 먹으며 깔깔대던, 오후에 또 교육받으며 졸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이후 회사 연수원이 지어지면서, 더 좋은 시설에서 동기들과는 퇴사하기 얼마 전에 한 번 더 교육을 받았다. 제일생명(현 ABL생명)은 대기업의 교내 면접, 입사지원, 자기소개서, 입사시험(글쓰기 정도로 기억) 후 합격까지를 경험하게 해 준 보험회사로, 첫 직장이면서 운명을 바꾸게 만든 시작점이기도 하다.




* 베고니아 (Begonia)의 꽃말은 '조심스러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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