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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트 Sep 27. 2021

슬픈소원

중3 어느 봄날

매일매일 연습장에
쓰면서 하던 기도가 통했다

"집에서 전화 왔는데 얼른 집에 가봐라." 하고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들은 기억은 나질 않는다. 하지만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집에 도착했을 때 길가에 있는 집, 입구이자 부엌문인 그 앞에서 엄마가 엉엉 우시며 말씀하시기를 "아빠가 죽었다. 느그 아빠가 죽었다. 우야노." 통곡하시는 모습이다. 아직도 남아있는 그 장면 속에 울지 않고 마음속으로 되뇐다. '아~ 소원이 이루어졌구나. 기뻐하면 안 되겠지? 그럼 슬퍼해야 하나? 그런데 눈물이 나지 않아. 울어야 하나?' 그렇게 간절히 원했는데, 그렇게 이루어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던 슬픈 소원이 이루어져 버렸다.


illustrated by 반트 ( hyacinth purple* )

   '염(殮)'이라는 걸 처음 접했지만 살아계신 듯 누워계신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다. 화장터 밖에서 본 굴뚝 위 날아가는 연기를 타고 가시는 듯하여 하늘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전한다. '미안해요. 그 소원 때문에 당신이 가신 거 같아요. 하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당신의 허리띠가 몸에서 세차게 소리 날 땐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잘못했다고 빌면서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만 했어요. 크면 이 집에서 탈출할 거라고 다짐 또 다짐했어요. 이제 더 이상 나쁜 아빠로, 나쁜 남편으로 살아갈 필요 없으니 다행이라고 여겨요. 잘 가요!' 집안의 가장이 사라진 후 엄마는 막연한 공포로 꽤나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내신다. 어리지도 어른도 아닌 눈이지만 약해진 엄마를 보면서 동화처럼 엄마도 금방 사라질까 봐 무섭고 두려운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작고 마른 엄마는 깡으로 버티고 버티며 두 딸을 잘 키워내신다. 엄마의 인생에는 여자는 없고 힘겹게 버티는 엄마만 있다. 엄마가 없다면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 엄마도 두 딸이 없다면 어찌 살았을까 싶다신다.


   슬프고 어두운 사춘기는 아빠의 빈자리로 서서히 보통의 10대 소녀처럼 살아지니 다행이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도서관 핑계를 대던 지난 시간과 달리 엄마를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한 덕분에 자연스럽게 성적도 향상되고 대학을 가서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야무진 꿈도 꾼다. 하지만 넉넉하지 않은 형편은 엄마에게 모진 말을 내뱉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부산 여자 상업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마지막 학창 시절이라 여기고 열심히 놀기도, 친구들과의 추억 쌓기도 하고, 나름 성적은 상위권 유지하면서 고3 여름방학 때 취업이 결정된다. 직업보도실에는 전체 고3 학생들의 증명사진, 주산/부기/타자 급수, 전교/반 등수 등이 기록되어 있는 앨범이 존재한다. 실력만큼 외모의 비중도 중요한 취업 과정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듯하다. 월등한 조건을 가진 게 아닌지라 취업 결정 후에는 바로 안도해 버렸지만 나중에라도 상고에서 최고의 직장인 은행을 도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그래도 그때는 보험회사도 꽤나 괜찮은 직업군이다. 한참 증권회사, 보험회사가 많이 생기던 시절의 대기업 계열로 월급도 괜찮은 편이며, 하는 업무도 은행과 비슷하다. 오히려 특정된 보험 설계사들과 일부 계약자들을 상대하는 일이라 나았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나란히 누워서 이야기한다. "엄마! 만일 아빠가 살아있었다면 집을 나가도 몇 번을 나갔을 기야. 다리몽둥이 몇 번은 분질러졌을지도 몰라. 그자?"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아이고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 난다. 진짜 느그들 아니었으면 벌써 짐 쌌다." 엄마 손을 잡고 "와? 나가지 그랬드노? 그랬으면 엄마 인생도 더 좋았을낀데. 우리도 알아서 집 나가고 그랬을낀데." 엄마는 "그기 안되데. 저것들이 내 없이 우찌 사꼬 싶어 가, 머리에 피가 나도 참고 살았지." 하신다. 눈물 나는 일이었지만 웃으면서 말한다. "엄마, 내는 미안하지만 지금이 훨씬 더 좋다. 숨 쉴 수 있어서 좋다 아이가. 고마 행복하게 살자. 돈 많이 벌어가 만 원짜리로 엄마 이불 만들어주께." 하고는 엄마 가슴품으로 머리를 들이밀면서 엄마를 안아본다. 언제 만들어 줄 거냐고 그 이불 얘기는 아직도 가끔 하신다. 오만 원권으로 만들어드려야 더 좋아하시겠지 싶다.


   그때 엄마의 나이보다 더 많이 먹어버린 지금은 엄마라는 단어만 생각해도 가슴이 저려온다. 매일매일 생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딸의 협박에 걸려온 엄마 전화는 목소리를 높여야만 정확히 알아들으실 수 있고, 딸이 보내는 적은 용돈을 모아 다시 딸에게 주실 거라고 하시며, 아프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엄마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위로한답시고 같이 늙어가자며 농담을 건네는 딸에게 서운하실지도 모른다. 무서웠지만 엄마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고, 힘들었지만 엄마가 있어서 살아갈 수 있고, 두렵지만 엄마가 오래오래 곁에 머물러 계시길 기도한다. '엄마' 그 존재 자체가 이만큼 삶을 살아오면서 똑바로 설 수 있게 한 딸의 유일한 종교이며, 그 믿음에 대한 그리움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 다음 생에서 엄마는 엄마 딸의 딸로 태어나 그 감사함에 보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사 기쁜 소원을 빌어 본다.





*히야신스 자주 (Hyacinth Purple)의 꽃말은 '미안해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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