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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트 Oct 01. 2021

기억저편

그렇게 될 줄 몰랐다

그 녀석이 온단다
학원 앞으로

아직 수업이 끝나려면 20분이나 남았다. 이젤 사이에 서 계신 선생님의 눈치를 살펴가며 창문 밖을 흘깃댄다. 그림들에 대한 중요한 말씀과 평가를 하시는데도 잘 들리지 않는 날이다. 어느덧 전봇대 옆에 서서 기다리는 그 녀석이 보이고 두근두근 설렘이 넘쳐 심장을 뚫고 나오는 것 같다. 마치 영화처럼 이라고 느껴진다. 훔쳐보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지만 심장 나대는 소리만 들릴뿐이다. 그냥 서있는 남자 한 사람인데 기억이 너무 또렷해서 아직도 기억 저편 그 녀석을 비추던 불빛이 그려진다. 참 이상한 일이다.


illustrated by 반트 ( marguerite* )

   회사 동기이자 제일 친한 친구가 미팅을 하잔다. 어릴 적 동네 친구들이라고 하며 그녀가 짝사랑하는 그 녀석도 나온단다. 신나서 연신 전화를 돌려 동기들로 멤버를 짠 뒤 서면 "Yesterday"에서 6 대 6 미팅이 성사되고 시골에서 올라온 순박한 녀석들과 만난다. 서로 파트너를 어떻게 정할지 얘기하다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 남주를 쪽지에 적어 뽑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철수와 미미의 청춘 스케치"의 미미를 뽑은 그 녀석과 공교롭게도 파트너가 되어 버린다. 다른 친구들도 각자 자신들이 뽑은 파트너 앞으로 수줍게 앉는다.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다는 사춘기도 아닌데 그렇게 떠들고 웃으며 즐긴 미팅은 처음이다. 부산 사투리보다 더 촌스럽다며 깔깔대었고 동갑내기 친구들이라 그런지 더 신나게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어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다.


   "내일 우리 월급날이다. 부산까지 온 촌놈들을 위해 우리가 쏘께. 그럼 내일 또 보자이." 그렇게 그날 밤까지 남은 세 녀석들과의 애프터 모임(?)을 약속한다, 다음 날 만나고. 그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만난다. 뭐가 그리 할 말이 많고 즐거운지, 일주일 하루도 빠짐없이 촌놈들과 퇴근 후 만나고 또 만난다. 결국 한 녀석은 며칠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부모님의 걱정으로 먼저 시골집으로 내려갔고, 그 녀석과 다른 녀석은 그다음 날 돌아갔다. 그 뒤로 그 녀석은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머하노? 밥 무겄나?" 안부를 묻고 일상을 얘기한다. 어쩜 평범하고 지루할 법한 직장 생활에서 걸려오는 전화 벨소리에 설레고 통화 시간이 길어질수록 끊기가 아쉬운 마음이다. 그렇지만... 마음속은 헷갈린다. 두근대는 설렘을 키워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 녀석을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멈춰야 하는 건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왜 하필 그 녀석과 인연이 되었을까 되묻는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그녀를 보면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녀석이 다가오면 올수록 멈춰지지 않는 마음에 혼돈한다. 연인도 아닌 친구도 아닌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는 마음이 뫼비우스 띠처럼 열심히 달리고 있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녀석이 부산까지 시외전화를 할 때는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빠른 공중전화 거나, 집에서 전화를 한다 하여도 전화요금 걱정을 해주며 재빨리 회사에서 다시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누나가 응답하는 집으론 전화하기가 힘들어 그 녀석에게 먼저 전화를 건 적이 별로 없다. 마음을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듯 보이기도 한다. 다행히(?) 재수를 하기 위해 대방역 근처 옥탑방 자취생활이 어설프게 시작되고, 모아둔 돈과 친구들에게 빌려온 돈이 보태진 서울살이와 재수생활이 녹록지는 않지만,  군대 간 그 녀석에게 별거 없는 일상을 편지에, 엽서에 적어 마음을 담아 보내는 소소함에 행복감을 느낀다. 우편함에 그 녀석의 편지가 들어있는 날은 침대 위에 누워서 몇 번을 읽고 또 읽는다. 지금처럼 이메일도, 핸드폰도, 그 이전의 삐삐도 없던 터라 아날로그 송수신은 느리지만 더 깊고 짙게 느껴진다. 간간히 휴가를 나온 그 녀석과의 만남은 힘들고 심란한 재수 시절에 나름의 위로주가 되고, 멈추고자 했던 마음을 움직여보려 하지만 서로의 타이밍은 딱딱 맞아떨어지진 않는듯하다.


    1년 뒤 옥탑방에서 이사를 해 이모네서 신세를 져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연락이 바로바로 되질 못한다. 서로가 각자 바쁜 생활이 이어지면서 드문드문 있던 전화 통화도 어느덧 사라진다. 그럼 끝난 것인데, 미친년 무슨 미련에서인지, 부산 갔을 때 시골 촌놈 친구들에게 그 녀석의 소식과 함께 삐삐 번호를 챙겨 온다.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졸업 전을 보러 오라고 삐삐 번호를 남겨본다. 답이 없을 거 같다는 예상을 깨고 전시회가 끝나 늦었지만 삐삐가 울려댄다. '아. 그 녀석의 연락이 왔어. 다시!' 학교 공중전화로 달려가며 신나 하던 모습과 묘한 감정으로 왜 이러지라는 질문도 해보지만, 마음껏 좋아해 주지 못한 탓이라 둘러대 본다 생각한다.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리고 재회를 약속을 한다. 다시 마주한 녀석과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으면서 예전과 다른 친구 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아! 이제 괜찮구나. 미련이 아니구나. 그냥 보고 싶었구나.' 그 마음이 좋다. '만일 핸드폰처럼 연락이 쉬웠다면 달라졌을까?'라고 자문해봐도 친구로서의 인연이다.


   20대 시절에서 제일 친했던 그녀가 좋아한 그 녀석과 미팅 파트너가 되었지만 마음 가는 대로 실컷 좋아해 주지 못하고 그렇다고 외면도 하지 않은 미성숙한 태도로 대했던 기억 속에 그 녀석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할 줄은 몰랐다. 그녀가 좋아하는 친구가 누군지 궁금해서 나간 자리가 그렇게 전개될 줄 몰랐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끔은 그 녀석이 떠오른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간간히 무심하게 "머하노? 밥이나 묵자"하고 전화하던 그 녀석의 목소리가 기억되고 "시집가라. 좋은 사람 만나라." 하던 당부의 말도 생각난다. 지난 방문 때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못 만나서 무척 아쉽더라. "잘 지내제? 담에 만나 차 한잔 하자!"




* 마가렛 (Marguerite)의 꽃말은 '마음속에 감춘 사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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