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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트 Oct 03. 2021

설렌인연

셀 한 장에 700원

두 번째 운명과 마주하다

어떤 용기에서인지 호기롭게 "안녕하세요. 한국 디자인 진흥원에서 주관하는 국비지원 프로그램을 신청한 디자이너입니다."라고 전화를 걸은 곳은 '새한 동화'였다. "아~ 어쩌죠? 우리는 이미 지원받아서 근무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직접 전화를 하게 되셨죠?" 이러저러 상황을 설명드리니 사무실로 올 수 있냐고 하신다. 이건 뭐지 싶어 한가닥의 희망을 갖고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챙겨 서울영상벤처센터에 있는 새한 동화로 달려갔다. 능동적으로 보인 태도가 이사님의 마음을 산 것인지 같은 빌딩에 있는 다른 애니메이션 업체인 '신우 프로덕션'을 소개해주셨다. 이렇게 애니메이션과 시작된 설렌인연이 운명을 바꿔놓았다.


illustrated by 반트 ( forsythia* )

   힘들어도, 잘되지 않아도,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라 결심한다. 버티고 또 버티면서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시험해보고 싶은 건지, 누가 누가 이기나 잘 보라고 외치고 있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너무나 다양한 일들이 스치듯이 지나가지만 그 하나하나의 경험이 쌓이고 있다는 건 뒤늦게서야 알게 된다. 미술학원 강사, 백화점 행사 판매직, 밸런타인 시즌 판매직, 선거철 전화업무 등 세상에 더 많은 일을 못해보다니 하며, 1초 정도의 후회로 위로한다. 이미 포토샵, 일러스트 과정을 마쳤지만 전문직으로 가기엔 미흡하다. IMF 여파가 길어지다 보니 슬프게도 여전히 동네 교차로, 벼룩시장에서 할 만한 알바를 찾고, 국비 지원 정책으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지 찾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취업 관련 지원 프로그램으로 디자이너와 디자이너가 필요한 회사를 연계해주고 소정의 급여를 지원해주며, 이 모든 것의 연계는 한국 디자인 진흥원에서 주관한다는 꿀 정보를 획득한다. 다만 제1 지망(캐릭터 디자인), 제2 지망(애니메이션)이 있어도 각 업체 연계가 딱딱 제대로 맞게 되지는 않아 다소 실망스럽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처음 연계된 곳은 학습지를 만드는 회사다. 학습지에 들어가는 컷 일러스트를 디자인하는 줄 알고 갔건만 그것만 시키지 않는다. 이건 아니지. 나랏돈을 이렇게 쓸 순 없다. 다시 요청해서 연계된 곳이 3D 애니메이션 업체다. 신문에서 떠들썩하게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일본과 제휴하여 진행됨을 파악하고 가서 나름 기대를 하지만, 감독이란 작자는 프로젝트에 참여시킬 생각이 전혀 없는듯하다. 차라리 도움 되는 일이 없으니 다른 데를 알아보라고 정확히 말해주면 알아들었을 텐데, 세상에~ 그냥 책상만 주고 일이 아닌 눈치만 보게 한다. 나중에 이 업계를 좀 알고 나서 든 생각이지만 그 당시에는 남자들이 대부분 섭렵하고 있는 3D 쪽은 여자로서, 특히나 무경험자로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당당하지 못해 주눅 들고 자존감 떨어져 있는 처지라 적극적이지 못한 탓도 있다 생각한다. 결국 참지 못하고 진흥원을 달려가 과장님에게 요목조목 잘난 척 따지기에 이른다. 미안하다고 달래시는 과장님에게 "직접 업체를 찾아오면 연계시켜 주실 거예요? 연계 신청한 업체 리스트 주세요. 연락해서 찾아올게요."  미안한 마음도 접은 당돌하기 그지없는 꼴이다. 어쩌면 마음의 여유가 바닥에 겨우 붙어있어 그 분노를 마음 약한 과장님께 표출했는지도 모른다고 변명을 해봐도 죄송스럽지만 행동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죄송했어요, 과장님!)


   만일 이사님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제작팀, 원화 A/B팀, 동화팀 등을 갖추고 외주제작이 주를 이루는 곳이다. 이사님의 소개가 어땠는지 모르지만 사장님은 제작부에서 엄청 바쁜 과장님의 업무를 보조해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신 거다. 3개월 남짓 동안 디자인 패키지, 스토리보드 복사하기, 애니메이션 종이, 연필, 지우개 등 비품 지급하기, 사장님, 과장님 심부름하기 등등이 주된 업무가 되니 갈등이 또 된다. 그때는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 무지하여 사장님, 과장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면서도, 언제 디자인에 참여하나 목 빠지게 기다리다가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일이 아닌지라, 그 목마름을 늦게까지 남아서 겨우 무한리필처럼 쓸 수 있는 종이에, 작품의 캐릭터들을 따라 그리면서 연습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렇다고 건방 떨며 찾아온 업체인데 마음에 안 든다고 다시 진흥원을 갈 수 있는 두꺼운 낯짝은 가지지 못해 다행이다. 직접 찾아서 오면 뭔가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후기라, 부끄러운 마음으로 버티다 보니 그게 애니메이션과 새 인연이 된 디딤돌이 된다. 그래도 한 가지! PC방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천리안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무료로 사용하는 남몰래 호사를 누린다. (사장님은 아마도 왜 이렇게 전화요금이 많이 나오냐 했을지도 모르겠다.) 띠띠 띠~~~~. 잠시 PC통신 전화모뎀의 사운드를 추억한다. 물론 엄청나게 빠른 통신의 발달이 디지털 강국 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새로운 디지털 세상은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온다.


   내적 갈등 속에서 퇴근하지 않고 끄적대던 모습을 오며 가며 보시던 원화 B팀 김 감독님께서 이것저것 소소하게 물어보신다. 클린업(원화맨이 캐릭터를 러프하게 그리면 그 위에 깨끗한 선으로 다시 그리는 일)부터 한번 해보라고 기회를 주신 감독님 팀에 자리 하나 잡고 아무런 지식 없이 시작한다. 하지만 해본 적이 없는 애니메이션 종이 위에 그린 선이 마음에 드실리가 없다. 다행히 다른 귀인이 등장하신다. 어느 날, 배경을 그리시는 박 감독님께서 슬쩍 오셔서 "너 배경 클린업 해볼래?"하고 물어보신다.  "진짜요? 네! 네! 해보고 싶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독님!" 신이나 대답하고 짐을 챙겨 자리를 옮기지만, 그림 그리게 해 줄 것처럼 불러 심부름을 시키던 김 감독님의 떨떠름한 표정은 생생히 기억난다. 그래도 제작팀에서 구출해준 것은 그 감독임에 틀림없다. 배경 클린업은 너무 재미있다. 인테리어 전공을 해서 공간감도 있고, 제도 실력을 뽐내던 시절이 나름 도움이 된다. 배경 감독님께서 각 씬에 맞는 배경을 러프하게 그려주시면, 디자인 패키지에 맞는 모든 디테일을 깔끔한 선으로 그려 넣어야 하는 작업이다. 캐릭터 클린업은 프레임에 맞춰 여러 사람이, 또 여러 장을 그리면서, 선이 튀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클린업이 매우 섬세해야 하는 것과 달리, 배경 클린업은 씬에 딱 한 장 그리다 보니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 평균 장당 500~700원 정도의 배경 클린업을 3 작품 정도 했을 때 즈음, 예상치 못한 감정 소모를 하게 된다. 사실 그랬다. 평균 3~4년의 동화 경력이 쌓였을 때 주어진다는 배경 클린업 자리를 우연한 기회에 하게 되었기에 동화맨들의 시기 어린 질투가 많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래 그러면 동화를 하면 되지'하고 동화팀으로 들어가 평균 장당 100~400원 정도의 초보 동화맨이 돼보기로 한다. 백 원 단위의 노동이 일인 애니메이션으로 밥 벌어먹기 쉽지 않구나, 허나 이 모든 경험이 훗날 다른 인생을 살게 만든 두 번째 운명으로 마주한다.




* 개나리 (Forsythia)의 꽃말은 '기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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