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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트 Oct 04. 2021

흐럍은빛

서른 즈음에

흐릿하고 얕은 빛이
반지하 방에 걸친다

서른을 맞이하고 침대 위에 누운 채, 문득 마흔이 된 미래를 그려보니 모든 것이 두렵게 다가왔다. 지금 열심히 배우면서 가고 있는 길이 너무 좋지만 제대로 바라보며 쫓아가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그냥 눈뜨고 일어나 출근하고, 새벽 2시 성남행 막차를 타고 어두운 집으로 들어오는 일상을 매일매일 반복하지만, 그것마저 영원할 것 같지 않다는 불안한 마음 또한 공존했던 그때는 반지하 방으로 어렴풋이 들어오는 흐럍은 빛과 처지가 같아 보인다. 놓지도 못하고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끝날 뻔했던 빛 한 자락, 그 끝이라도 잡아보려 한다. '그 빛의 끄트머리가 꼭 화려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삶이다'를 한참이 지난 뒤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illustrated by 반트 ( poppy* )

    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은 클 수도 크지 않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업체는 미국, 캐나다, 일본 등의 외주를 받아서 제작하는 아웃소싱들이 주를 이루거나 한 번 더 국내 외주를 받은 영세 업체들이다. 간혹 자체 제작을 하는 업체들이 있어도 성공을 거두는 작품들은 손에 꼽는다. 애니메이션 업계에 들어와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를 처음 알고 설레지만, 그 설렘을 지속하기란 쉽지 않아, 결국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 신문을 뒤적이며 국비지원을 알아본다. 웹디자인 과정을 신청하고 오전에는 학원을 다니며 오후에는 출근하여 하루에 2,000~3,000원 벌기를 한다. 카드 돌려막기와 현금 서비스 현타가 목구멍에 차오르기도 하고 어찌 살아내고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빛이라 믿고는 있지만, 너무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아 서글픈 날도 많다. 오전 수업이라 그런지, 이미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할 줄 안다는 것은 70%가 주부들인 그룹에선 큰 장점이 된다. 플래시와 드림위버를 새롭게 배우면서 제출하는 과제의 결과가 다른 분들에 비해 나을 수밖에 없고 애니메이션 경험도 가지고 있으니 강사님께서 일자리 추천을 해주신다. 애니메이션을 하면서 등줄기의 짜릿함을 느끼는 행복도 있지만 숨은 쉬어야 되기에 어쩔 수 없이 더 이상의 고집은 무리다. 소위 가방 끈 튼튼하지 못하고, 낮을 대로 낮아버린 자존감이 바닥을 박박 긁고 있을 때라 망설임 없이 애니메이션과의 인연은 추억으로 고이 접어 넣어 두기로 한다. 아쉽지만...


    오전반, 오후반 각 1명씩 추천받아 면접을 는데, 회사는 오후반 4년대졸 디자이너가 더 마음에 들지만 야근 유무 질문에 NO라는 그녀의 대답 대신, 열정 페이도 감수하고 야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간절 모드 답변을 선택했다고 나중에 듣게 된다. 뭐 어쨌든 재취업을 해서 장당 몇백 원으로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이미 서른 나이가 적지 않으니 현실을 바로 봐야 한다고 수긍한다. 꿈이 밥 먹여주지 않고 있으니 지금이 맞다고 다독이게 되는 스스로를 응원하면서 자존심 상하는 것이 아니니 다행이라고 여기며 로한다. 회사는 규모 있는 교육 업체의 자회사로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e-book 제작을 하고자 하는 미래형 교육 콘텐츠 업체다. 실로 오래간만에 꼬박꼬박 정확하게 세금 내면서 통장에 월급 찍히는 경험을 한다. 직장 동료들과 회의를 하고, 점심도 같이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수다도 떨고, 일이 끝나면 간단하게 맥주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도 너무 오랜만인 것 같다. 보험회사를 다닐 때 느꼈던 직장생활, 즉 그 안정된 느낌의 직장생활 그것 말이다.


    2000년대가 시작되면서, PC통신은 오래된 과거처럼 광케이블 시대를 향해 급속도로 변화한다. 회사에서는 메신저를 통해 대화를 하고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회사 공지를 알린다. 삐삐는 이미 구유물이 되고, 반짝 나타났다 사라진 시티폰이 지나가고 나서, PCS(개인휴대통신, Personal Coummunication Service) 폰을 소지하면서 점점 공중전화가 사라지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세이클럽' 채팅창에 빠지는 취미를 갖게 되고 '싸이월드'로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공유하며 도토리를 사서 메인 화면을 꾸미고, '아이러브스쿨'로 학창 시절의 동창을 찾기도 한다. 라디오 프로그램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작은 코너로 개그맨 박명수 님의 '아이러브스쿨'에 전화 통화 당첨되어 문화 상품권을 선물로 받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예 모르는 사람들도 아는 사람들로 만들 수 있는 '카페'라는 것이 활성화되면서, 같은 주제와 관심사가 있으면 거리낌 없이 더 빨리 친해지고 정보를 나누는 새로운 신선함을 접하게 된다. 어느 정도 직장생활이 안정화될 때 즈음, 취미생활뿐만 아니라 스멀스멀 접어두었던 애니메이션 관련 정보를 뒤적이기 시작한다. 국내에 있는 애니메이션 대학교를 알아보기도 하고 관련된 정보를 검색하기도 한다. 주말이면 비디오 대여점에서 카페 추천작 '슬램덩크' '바람의 검심' 같은 비디오와 '시마과장' '에반게리온' 같은 만화책 등을 빌려와서 보기도 한다. 인터넷 세상은 '정보의 바다'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시대가 열린 것이다.


   흔한 일본 스타일의 애니메이션 작품은 선호하지 않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과 지브리 스튜디오 스타일 같은 그림체는 아주 좋아한다. 물론 디즈니 스타일도 나쁘지 않다. 어떤 스타일이든 배우려면 미국을, 일본을 가야 하나 상상하니, 거긴 돈이 엄청 들 것 같다. 캐나다에도 괜찮은 애니메이션 학교가 있다 하니, 검색에 검색을 거듭해서 카페를 가입하고 정보들을 수집하다 보니, 잡히지도 않는 허상 속이지만 아쉬웠던 마음이 찾고, 묻고, 들은 정보만으로도 채워지는 듯하다. 로또를 품고 일주일을 행복해하는 사람처럼 검색한 정보들이 많아질수록 왠지 이루어질 것 같은 희망을 품게 되는 뜬구름 같은 마음은 로또와 비슷할 것 같다. 여름방학 한 달 동안 밴쿠버를 다녀온 동생이 "캐나다 이민을 하면 학비가 싸데. 한번 알아봐~"라고 툭 던진 말은 다른 입구를 찾아서 원하는 길을 갈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하고 더 들뜨게 한다. 그렇게 캐나다 이민 자료를 찾다가, '그래! 이민이라면 가능할라나?' 영어 점수, 아니 영어 시험도 칠 수 없을 만큼의 수준이면서 왜 이런 무식한 용기가 나오는 걸까. 어이없다. 로또가 되지 않을걸 알지만 혹시나 되면 난 집을 사고 자동차를 사고 등등의 상상을 하듯,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로또를 사는 것, 그것과 비슷한... 되면, 그래 되면 기회가 오는 거니까 일단은 해보자는 그냥 딱 그 마음, 그거다. 그동안 눈으로 보기만 하면서 상상하던 헛된 희망 '유학'이 구체적으로 계획해보는 '이민'으로 바뀐다. 과연 반지하 방에 흐릿하게 걸친 그 빛이 잡힐까?




* 양귀비 (Poppy)의 꽃말은 '위안, 위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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