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트 Sep 30. 2021

미대입시

스물한 살의 꿈

4층에 미술 학원이 있다

부산 거제동에 위치한 영업소에 근무하면서 계단 바로 옆 우편함을 매일 확인한다. 특히 월초가 되면 4층 미술학원 우편함에 빠져나와있는 대봉투에 '미대 입시'라 쓰여있는 책자를 보곤 했다. 가끔 서점에서 그 잡지책을 보아왔던 터라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날은 왜 그랬을까? 잠깐 깨끗하게 보고 돌려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몇 달을 그렇게 몰래 훔쳐본 뒤로 조금씩 잠자고 있었던 그림에 대한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스물 다섯 정도가 되면 자연스럽게 결혼을 생각하고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이젤 앞에서 그림 그리는 여자를 상상했다. 돈도 벌고 하니 취미 삼아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퇴근 후에 다닐 수 있는 집 근처 미술학원을 찾아갔다.


illustrated by 반트 ( snowdrop* )

   엄마 말씀으론, 비어있는 여백만 보이면 그림을 그려댔다고 하신다. 겨우 9살짜리가 숙제로 불조심 포스터를 밤늦은 시간까지 그려 말려놓고 잠들지만 아침에 망가져있는 그림을 보고 울음을 터트린다. 동생 발바닥에 물감이 묻어있는 걸 확인하고는 더욱더 억울하게 소리 높인다. 붓질을 할 때의 그 느낌이 너무 좋다. 선을 넘지 않으려고 애쓰고 원하는 색감을 만들어 딱 맞게 색칠하고 잘했다는 칭찬과 더불어, 그림으로 상을 받을 때는 공부를 잘한다는 얘기보다 더 듣기 좋다. 영어 시간에 선생님 몰래 붓을 들고 미술 숙제를 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렇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길로 갈 수 있는 처지는 분명 아니다. 꿈을 화가라고 써도 미술반에 들지도 않는다. 돈이 드는 직업이며 돈이 안 되는 직업이기도 하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다.


   성인 취미반 정도로 생각하고 수채화, 유화 정도를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린다. 우선 소묘부터 시작해 보자 신다. 어찌나 흥분되고 신이 나는지, 평소와 달리 칼 퇴근을 하고는 학원으로 달려간다. 꽃꽂이도, 서예도, 홈패션도 오래가지 못하고 한두 달에 그쳤지만 그림은 다르다. 그릴수록, 배울수록 가슴에서 요동치는 느낌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매일매일 미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것인지, 20대가 되어도 그 설렘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심장을 미치도록 뛰게 한다. 그 시절엔 토요일도 오전 근무를 하고 하물며 소장의 눈치를 보며 퇴근을 해야 하는 때이기에, 6시 퇴근을 할 수 있게 용기를 준 것 또한 그 설렘이 분명하다. 행복하던 설렘은 간절한 도전으로 바뀌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불씨를 댕겨주신 미술 선생님은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학을 가보는 건 어때? 이 정도면 굉장히 빨리 늘고 해 볼 만 한데?" 그 낚싯밥을 덥석 물어버린다. "진짜요? 전문대라도 갈 수 있을까요?" 그 반응을 기다리신 듯 "내신이 좋으니 부산대도 갈 수 있지. 생각해봐라."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엄마랑 소리 내며 대학 갈 거라고 싸웠었고, 형편을 모르지 않기에 도전하지 못했던 일인데 이게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날 밤은 잠이 오질 않는다. 생각에 생각을 더해도 큰 고기를 낚을 듯 기대하기 시작한다. 밤새 집을 쌓았다 부셨다 난리도 아니다. 이 또한 성격 탓에 결심을 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입시 미술은 다르다. 그러니 1년 치 학원비를 먼저 내면 구성 선생님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잘해봐라" 선생님의 선납 제안이 굳이 돈 때문에 바람 넣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피하고 싶은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그 헛된 바람이 나중에는 헛되지 않았기에 괜찮다. 10년 넘은 시간이 지나고 우연히 선생님을 다시 만날 줄 몰랐고 그분과의 끝이 씁쓸할 줄도 몰랐지만 말이다.


    힘든 줄도 모르고 새벽 단과반을 다니며 학력고사를 준비하고, 퇴근하면 미술학원으로 달려가서 늦게까지 입시 미술에 매달린다. 처음 시작했던 설렘이 압박감으로 바뀌는 시간도 금세 찾아온다. 기대보다 그림이 금방 늘지 않는 것이 아마도 부담이 온몸을 눌러서라는 것도 알고 있다. 결국 그림 시작한 지 6개월여 만에 꿈이라는 포장을 씌워 용기 내어 사표를 던진다. 걱정하시는 엄마를 대학 가면 미래가 보장될 것처럼 묘하게 설득하고는 입시에 집중하기 시작해 보지만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나름 노력은 하지만 짧은 시간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현실은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자. 화구 박스에 잔뜩 물감과 붓을 챙겨 싼다.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물풍선 같은 꿈이 서울에 있으니 가서 구경이라도 하고 오자 싶다. 안될 줄 알지만 로또를 사서 기대하듯, 엄마가 없는 돈에 끊어 주신 비행기를 타고 최선을 다해 보기로 한다. 일정은 실기가 먼저다.


    이젤자리를 놓고 눈치 싸움을 하며 지지 않으려 애쓴다. 미켈란젤로를 다 그리고 뒤에 서서 그림을 보는데 아뿔싸! 다른 그림들보다 조막만 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대형 석고상이 도화지에 꽉 차고 웅장하게 보이는 다른 그림들 사이로 좁은 어깨가 창피하다는 듯 미켈란젤로가 노려본다. 다음 날 구성을 보던 시험장은 아직도 그 냄새며 분위기가 생각난다. 시간 내로 마치기도 빠듯하지만 또 한방 먹어버린다. 붓을 던지고 뛰쳐나오고 싶은 부끄러움은 지금까지 생생하다. 그 쪼그라든 심장은 패배보다는 또 다른 용기를 만들고, 온전한 독립의 시작을 알린다. 그 도전이 지금의 자리 또한 만들게 되니 무조건 나쁜 경험은 아니라 여긴다. 그렇지... 훔쳐보던 잡지책이 시작이 될 줄은 몰랐지. 그때는 말이야.




* 스노우드롭 (Snowdrop)의 꽃말은 '희망'이라고 한다.


이전 04화 보험회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