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아침. 바나나우유. 벌레
출퇴근 시간이 문제다. 아니 남편이 물려준 구형 아이폰이 문제다. 가장 싼 플랜으로 해놓았더니 일주일이면 데이터 용량이 똑 떨어진다. 다들 전화기만 쳐다보는 기차 안에서 나는 볼 것이 없다. 그래서 자꾸 잡생각이 나는 게 문제다.
몇 년 전만 해도 재택근무를 하는 남편이 아침저녁으로 채스우드 기차역에 나왔다. 기차역은 걸으면 집에서 20분 정도. 지각한 아침이면 차로 부랴부랴 데려다주기도 하고, 저녁엔 역에서 만나 근처 한국 식품점에서 바나나 우유, 메로나 하나씩 사 들고 그날 일을 얘기하며 걸어오기도 했다.
싸움이 잦아진 후 몇 번 내가 혼자 걸어 들어가자 남편은 더이상 마중 나오지 않는다. 멀지 않은 거리이기에 나도 그냥 걷는다. 오늘 해야 할 일과 내일 해야 할 일들을 타박타박 길 위에 떨어뜨리고 나면 빈 마음 안에는 채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남편을 채웠다. 옆에 있었고, 줍기 쉬웠고, 너무 많았다. 하나씩 하나씩 채우고, 씹고 버리고 나도 다음날 또 채울 게 생겼다. 미움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이상하다 미움 한 점 씹고 버리고 나면 또 풍성해져 땅 위에 가득 차네. 오!
기차가 플랫폼에 서고 사람들을 토해낸다. 비가 올 것 같다. 차로 데리러 오라고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냥 걷는다.
톡. 톡. 흰 지팡이가 뒤에서 나타난다. 옆으로 비켜난다. 내 또래의 여자가 지나간다. 텅 빈 동공은 아무 곳도 보고 있지 않지만 대신 지팡이는 바쁘다. 쉬지 않고 부채꼴로 왔다 갔다 길을 살핀다.
곧 계단인데.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가던 내가 오히려 멈칫거린다. 하나. 둘. 셋. 넷. 계단 끝. 하나. 둘. 셋. 넷. 다섯. 오른쪽으로 턴. 하나. 둘. 셋. 다시 왼쪽.
가끔 코너를 돌 때나 계단이 끝날 때 잠깐 멈칫하지만 그녀는 이내 확신을 가지고 걷는다. 그녀의 지팡이, 발, 손, 귀가 모두 녹아들어 거대한 벌레의 더듬이가 된다. 아마 수도 없이 이 길을 걸었나 보다. 수도 없이 보폭을, 소리를, 냄새를 세었으리라. 그래도 노파심에 나는 그녀와 보폭을 같이 한다.
건널목이다.
시각 장애인에게도 횡단보도임을 알려줄 수 있도록,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서는 길목에 볼록한 점형 블록이 설치되어 있다. 꽤 쌀쌀한 늦가을인데도 그녀가 신고 있던 얇은 슬리퍼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지금껏 나는 이 점형 블록의 용도를 모르고 살아왔다.
톡. 톡. 점형 블록을 발끝으로 치며 그녀가 선다.
도와줘야겠다.
Do you need some help? 입을 떼려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묵직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 Could I cross the road with you?
그녀가 활짝 웃으며 대답한다. Oh, Thank you! I really hate crossing. 그들이 함께 손을 잡는다. 나는 한발 늦었다.
길을 건너자 할아버지는 간단한 인사를 하고 다른 길로 간다. 할아버지는 왼쪽, 나와 그녀는 직진. 다음 건널목에선 내 차례라는 생각으로 총총히 그녀를 따라간다.
- Mommy!
다음 건널목에 도착하기 전, 네 살 남짓한 아이가 쪼로로 앞에서 달려온다. 그녀는 아이가 오기도 전에 손을 활짝 뻗으며 달려간다. 그녀의 지팡이, 발, 손, 귀 모두 활짝 피어나 그녀는 거대한 나비가 된다. 그녀는 아이를 안는다. 그 뒤에 걱정스러운 눈을 한 남자가 맨발로 천천히 다가온다.
How was your day? 아이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맨발의 남자가 더듬이를 맞댄다. 그들은 손을 잡고 함께 건널목을 건넌다.
(21.08.25. 수진. Cross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