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술
바짝 마른 하루가 물을 끌어당긴다.
이런 날을 핑계로 술을 산다.
맥주와 나는 서로의 지리멸렬함에 쉽게 뒤돌아서지 않는 끈끈한 관계.
가벼운 간식거리를 산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와 편의점으로 향한다. 익숙한 듯 몇몇 과자와 아이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사고 캔맥주 6개들이 팩을 모르는 척 집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재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기대 때문인지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몇 번을 다시 쓴 서랍 속 각서가 비웃듯 차갑게 돌아눕는다.
항상 이렇게 술을 마셨던 것은 아니다.
잠이 오지 않아 한두 잔씩 마시고 잠을 청하던 것이 어느덧 정신 차려보니 매일 대여섯 병으로 늘었다.
처음엔 무던히도 아내와 싸웠지만 다섯 번째 각서가 구겨지던 날부터는 아내도 포기한 것 같다. 아니, 날 버린 것 같다. 버리면 버리라지. 맥주가 두어 잔 정도 들어가면 내가 나를 버려도 그리 아프지 않다.
차갑게 식은 맥주를 더 차갑게 식히려 냉동고에 넣어둔다. 이렇게 잠깐 두었다가 병에 살얼음이 살짝 돌 때 꺼내면 가장 시원하다. 바싹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며 냉장고 앞에서 서성거린다. 기다림은 갈증을 더 알맞게 익힌다. 계속해서 이쪽을 쳐다보는 아내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다. 맥주가 차가워질수록 얼굴은 달아오른다. 괜찮다. 부끄러울수록 더 갈증이 나고 갈증이 날수록 맥주 맛은 더 좋아진다.
맥주가 딱 알맞게 차가워지면 이제 꺼내서 같이 차갑게 식힌 잔에 따른다.
한 번은 냉동고에 넣어둔 맥주를 깜빡 잊고 꺼내지 않았다가 맥주병이 폭발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보통 차가우면 수축해야 할 텐데 왜 폭발하는 걸까. 차갑다가 폭발하다니. 꼭 아내를 닮았다는 생각이 잠깐 스친다. 아내는 냉동고 속 유리와 거품의 잔해를 오래도록 닦고 또 닦았다. 어쩌면 그때부터일까. 아내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좋다.
보글보글 기포와 함께 생크림 같은 맥주 거품이 올라온다. 조금이라도 흘릴까 재빨리 입이 마중 나간다. 차가운 맥주가 목구멍으로 꼴깍꼴깍 넘어간다. 이제 조금 숨이 쉬어진다.
맥주의 고장 벨기에에서 아내와 맥주 투어를 하던 때가 생각난다. 론리 플래닛을 뒤져서 찾아간 오래된 펍에는 맥주 종류가 1,000가지나 되었고 그 맥주마다 1,000가지 다른 잔이 있었다. 수능 공부를 다시 하듯 열심히 맥주를 고르자 각기 다른 모양의 잔들이 테이블에 가득했다.
전날 밤 열심히 벼락치기한 실력으로 왜 이 잔에 이 맥주가 어울리는지 열띠게 설명하자 볼이 예쁘게 달아오른 아내가 웃었다. 어두운 펍 안에 햇살이 잠깐 비췄다. 그때는 아내도 술을 꽤 좋아했다.
여섯 병쯤 마시면 술기운이 딱 알맞게 올라온다. 주사는 부리지 않지만 적당히 나를 잃을만하다. 더이상 마시면 다음날이 힘들다는 건 몇 년에 걸친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날이 힘들어서 마신 술이 나를 힘들게 한다. 그렇게 점점 나도 하루도 바싹 마른다. 이런 날을 핑계로 술을 산다.
(2021.10.12. 수진. 'Chandeli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