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글 크로키

Snowman in Spring

(키워드: 용수철, 눈사람)

by 수진

그녀는 차가운 공기를 코끝에 느끼며 눈을 뜬다.

집 안이지만 후- 숨을 내쉬면 입김이 공중에 하얗게 흩어진다. 그녀는 미적거리면서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연다.


이곳은 눈이 오지 않는다. 체감 날씨는 춥지만 바깥 기온은 절대 얼음이 어는 온도로 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사라지면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다.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따라가는 것이 기억인지 기억의 그림자인지 알수 없게 된다. 기억의 편린이 어른거리는 어둑한 가장자리에서 물안개처럼 새로운 기억이 피어오른다. 그 기억은 사라진 기억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푸른 눈빛을 갖고 있다.

눈 내리는 날 새벽의 정경은 그렇게 그녀의 기억 속 푸른 그림자로 영원히 머물러 있다가 추운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그녀를 흔든다.


왜 눈에 대한 기억은 지독히도 모순적인 걸까. 그녀는 생각한다.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하게 내리는 눈이지만 분명히 그녀는 한밤중에 사락사락 내리는 눈의 소리를 들었던 것만 같다. 그 소리가 텅 빈 골목길을 달려가 추운 겨울이 따뜻했던 것만 같다.

사람들의 잰 발걸음에 밀려 구석에서 회색으로 질척거리던 모습 또한 생생한데, 왜 입술을 모아 눈. 이라고 말하면 마음에 순백의 꽃이 포로로 떨어지는 걸까. 차가운 눈사람을 안으면 왜 따뜻하고 포근할 것만 같을까.


춥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찬장에서 커피를 꺼낸다. 전기 포트 스위치를 올린다. 보글보글- 물이 끓기 시작하며 허공에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본다.


그는 어젯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도 더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에 연락하지 마.


사무적인 마지막 말을 뒤로하고 그는 가볍게 떠났다. 그녀는 달칵. 문을 닫고 도어 체인을 단단히 걸었다. 방 안에 고여 있던 어둠이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때 그녀는 그들의 사랑이 용수철 같다고 생각했다. 죽지 않는 것, 눌러도 눌러도 언제 누른 듯 다시 살아나는 것, 누른 만큼의 탄성으로 더 힘있게 솟아올라 가슴을 방방 뛰게 만드는 것.

그러나 탄성 한계를 넘어선 용수철이 영구히 망가지듯, 지금 그녀는 방 안에 갇혀 늘어져 있다.


이제 끝이야. 그녀는 수천번 속으로 되뇌었던 그 말을 다시 소리 내 말해본다. 정말? 정말 끝이야? 그림자 속 푸른 기억이 물어본다.


-응. 이제 됐어. 다했어.

-괜찮겠어?


괜찮을까. 그녀는 스스로 문을 닫고 떠났던 많은 얼굴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유독 문을 닫기 힘들었던 그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린다. 닫았다고 생각했지만 멀리서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화르르 달아올라 벌컥 문을 열어젖히던 그녀의 붉은 뺨을 떠올린다. 닫은 것이 아니라 식어간 것과 식어간 것이 아니라 녹아내린 어떤 것을 떠올린다.


왜 어떤 것은 차가운 것 속에 숨어 있어 더 따뜻한 것일까. 너무 쉽게 사라지는, 그래서 아쉬운 연약한 마음. 그러나 따뜻할 때 사라지는 차가움이어서 더 숨가쁘게 따뜻한 그 마음의 아이러니를 생각하다 그녀는 눈을 감는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그녀는 따뜻한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쥔다. 추운 아침이라 커피가 더 뜨겁게 느껴졌다. 커피를 식히려 후-후- 불자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다. 어디까지가 차가운 입김이고 어디까지가 따뜻한 수증기인지 알 수 없었다.


따뜻한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그녀는 녹기 시작했다.


(2022.2.14. Snowman in Spring)

keyword